[도서 리뷰 정리]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 『계몽의 변증법』 / 「문화산업 :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 문학과 지성사

Posted by 딤레인
2017.01.03 18:10 독서/학술

- 목 차 -

1. 대중 기만으로서의 문화산업

2. 문화상품의 속성

3. 문화산업과 예술

4. 마치며






아도로노,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각주:1]



저번 포스팅에서는 『계몽의 변증법』의 첫 번째 장인 「계몽의 개념」을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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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정리]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 『계몽의 변증법』 / 「계몽의 개념」 / 문학과 지성사



이번 포스팅에서는 첫 번째 장 이후에 이어지는 「문화산업 :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 장에서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논의를 문화비판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아도르노의 문화비평서술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분석보다는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통찰이 주를 이룬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서술 방식은 철저히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서술방식은 필연적으로 논리적 체계 내에 구속될 수밖에 없다. 체계를 세우고 이 안에 구속되어 결국 신화의 지위로 떨어지는 것이 바로 아도르노가 첫 장에서 비판한 ‘계몽의 변증법’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변증법에서 벗어나 사유하기 위해서는 감각과 직관에 의한 통찰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숲 안에서 숲을 볼 수 없고, 숲을 벗어나야 숲을 볼 수 있는 이치와 흡사한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책에 접근한다면 조금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본다.



1. 대중 기만으로서의 문화산업


근대에 이르러 인류가 이룩한 문화는 문화‘산업’이 되어버렸다. 첨단기술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문화산업은 문화적 진보의 무한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화산업에 대한 아도르노의 진단은 상당히 비관적이다. 



문화산업은 대량생산체계와 맞물려 거대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방적으로 문화상품을 생산 및 공급한다. 이는 문화적 다양성과 특수성을 획일성과 보편성 안에 흡수하면서 모든 것을 동질화 시키고, 이를 소비하는 대중들의 자기 동일성을 해체하여 문화산업이 만들어낸 체계 안에 포섭시킨다. 문화산업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인류 문화의 융성에 기여하고 있다며 자화자찬 한다. 그러나 문화산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장사business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장사야말로 문화산업의 본질인 것이다. 문화산업의 자화자찬도 사실은 소비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만들어낸 문화체계를 긍정하도록 선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자화자찬 속엔 그 어떤 자부심도 신념도 없다. 단지 철저하게 계산된 이해타산만이 존재할 뿐이다. 



문화산업이 자신의 이해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부수적인 결과물로 문화융성이 뒤따른다면 굳이 이를 비판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문화융성을 가져오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하루가 다르게 유행은 바뀌고 시장에서는 화려하게 치장된 각종 문화상품이 쏟아져 나온다. 여러 가지의 유행, 수를 셀 수없는 수많은 문화상품의 범람은 문화융성의 명백한 증거로 여겨진다. 그러나 과연 이것을 문화융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 



다양한 문화들이 각각 자생력을 가지고 스스로를 재창조하면서도 전체와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문화융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융성하는 대중문화라면 그 내부에는 다양성과 자생성이 깃들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문화산업에 의해 공급되는 대중문화에는 다양성도 없고 자생성도 없다. 



먼저 대중문화에는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문화상품과 문화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지만 그들 모두는 동질적이고 획일적이다. 각 상품에 부여된 아무 의미도 없는 미세한 차이에 의해서 각 상품의 가치가 결정되고 상품 간 위계가 형성된다. 본질적으로는 동질적인 문화상품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대중은 미세한 차이에 대한 선택권만 가질 뿐 그 밖을 넘어서지 못한다. 어디에서부터 유래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는 일시적인 유행에 따라 문화상품은 카멜레온처럼 색을 바꾼다. 소비자는 단지 그 조류 안에서 오직 미세한 차이들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대중문화에는 자생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쏟아져 나오는 문화상품은 대중이 자생적으로 형성한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문화산업에서 만들어낸 인공적 기호가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질 뿐이다. 대중이 접하는 각종 미디어에는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산업은 소비자의 기호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문화상품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대중이 보이는 문화적 선호는 자생적으로 발생한 능동적 선호가 아니라 공급된 문화상품에 대한 피동적 반응인 것이다. 이러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과정 자체가 고도로 체계화된 문화산업의 계산과정에 입각해 있다. 



이렇듯 획일적이면서도 일방적인 문화적 토양을 과연 문화융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는 계몽이 자연을 넘어 인간까지도 자신의 체계 안에 흡수하여 가둬버린 것과 같은 방식이다. 계몽이 자연과 인간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듯이 문화산업은 문화와 소비자대중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문화산업은 단지 자신이 축조한 닫힌 체계 안에서 미세한 차이로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대중으로부터 이윤을 거둬들일 뿐이다.



2. 문화상품의 속성


문화산업에 의해 생산되는 문화상품은 소비자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소비자대중이 누리는 즐거움은 적극적인 행복이나 만족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공허하며 우울한 현실로부터 끝없이 도피하지만 결국 제자리로 순환하는 즐거움이다. 



문화상품을 향유함으로써 소비자대중이 느끼는 감각까지도 이미 생산자들에 의해 규정되어있다. 소비자는 문화상품으로부터 새로운 감각을 느끼거나 분류할 수 없다. 음향과 색채, 분위기, 사회적 명성과 편견을 최대한 활용하고 계산하여 만들어진 심미적 효과들이 대중의 감각을 강요하고, 각종 최면적인 선전과 광고들이 소비자대중의 감각을 교란시킨다. 이로써 소비자대중은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며, 현란하고 복잡한 일방적 감각자극들을 따라가는 데에도 벅차게 된다. 문화상품을 통해 대중이 느끼는 이러한 즐거움은 사실상 정신적 중노동이다. 이러한 문화상품 앞에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사유를 멈추고 감각을 완전히 이완시켜 문화상품이 끌고 가는 방향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된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소파에 뉘어놓고 넋을 놓은 채 바라보는 각종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광고들은 문화상품의 일방적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문화산업에 의해 공급되는 문화상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여가의 일환으로 공급되는 것과 동시에 상품광고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소비자대중은 여가시간에서 조차 수많은 직간접광고에 노출되며 소비 욕구의 자극을 강요당한다. 체계가 이룩해놓은 경제 메커니즘은 대중의 하루 일과 전체에 침투한다. 대중의 하루 일과를 면밀히 분석하여 자신의 이윤추구체계 내에 포섭해버리는 문화산업의 철저한 계획은 계몽의 산물이다.



“문화산업은 소비자의 모든 욕구가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제시하지만 그 욕구들은 문화산업에 의해 사전 결정된 것이다. 소비자는 자신을 영원한 소비자로서, 즉 문화산업의 객체로서 느끼게 되는 것이 체계의 원리다.”[각주:2]



문화산업은 자신이 축조해낸 체계를 긍정하는 문화상품을 생산해낸다. 이 체계 내에 포섭된 소비자대중은 문화산업에 의해 기만당하면서도 자신이 기만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문화산업의 번영과 유지에 지속적으로 동원된다. 문화산업이 공급하는 문화상품은 결국 대중이 하루하루 직면하는 우울한 일상생활의 찬양이다. 문화상품을 향유함으로써 잠시 동안은 일상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지만 결국 즐거움은 허무하게 끝나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와 일상으로의 회귀의 영원한 순환은 체계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원리이며, 이 순환 자체도 문화상품이 대중에게 심어놓는 환상에 의해 미화되고 찬양된다.



3. 문화산업과 예술


문화산업에 의해 예술은 크게 변질되었다. 물론 예술은 오래 전부터 상품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날과 같은 노골적인 상품은 아니었다. 문화산업 이전의 예술은 비록 상품이 되어 팔려나가긴 했지만, 그 내부엔 상품을 뛰어넘는 예술 그 자체로서의 본질과 자율성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문화산업에 종속된 예술은 자율성을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상품성을 과시한다. 예술이 표현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은 목적에서 수단으로 격하되었다. 예술에 표현된 아름다움이 세상에 인정되어 상품이 되어버리는 경우와는 달리, 문화산업에 종속된 예술은 상품이 되기 위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예술의 본래 목적이 수단으로 격하된 이상 그 수단은 철저히 문화산업체계 내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상품으로서 성공하기 위한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예술 그 자체가 아름다운 감각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전적으로 결정된 감각에 맞춰 생산된 예술상품을 아름답다고 여기도록 강요하는 것, 이 방식이 바로 문화산업이 예술을 상품으로 팔아치우는 주된 방식이다.



예술이 성질이 이와 같이 변질되면서 예술의 쓸모가 부각된다. 예술 그 자체는 쓸모로부터 벗어나 있다. 순수한 의미로서의 예술은 아름다움만을 추구하기에 그 자체로 어떠한 쓸모나 효용도 없다. 그러나 예술이 문화산업에 포섭되는 순간 예술에 대한 쓸모와 효용을 계산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쓸모와 효용이 없다면 그 예술은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예술만이 쓸모 있고 효용 있는 예술이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술은 그것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에 의해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물신(物神)이 되어버린다. 즉, 사회적 평가에 의해 그 예술의 가치가 인정받는 것이다. 그 예술이 아름답든 아름답지 못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단지 체계에 의해 그 예술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평가받는 것 그 자체만으로 그 예술의 가치는 상승한다. 대중은 예술을 자신이 느낀 아름다움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진 평가를 그대로 답습하여 자신의 주체적 평가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 이것은 예술이 아름다움으로 평가되는 사용가치가 아닌 경제적 교환가치에 종속됨을 의미한다.



4. 마치며


문화산업에서 발견되는 계몽의 지배, 계몽의 변증법은 소비자대중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적극적인 문화향유자로 착각하게 만들면서 실은 소비자대중에 대한 문화적 지배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이는 소비자대중의 정신과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공허하게 만든다. 대중은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의 자연성을 상실하고, 감각의 자유를 빼앗긴 채 문화산업이 지시하는 대로 느끼며 소비하는 계몽의 변증법 속에 빠져있다. 아도르노가 진단했듯, 특수성이 획일적인 보편성에 잠식당한 문화적 상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일 것이다. 



“내면생활 전체는 자기 자신을 성공에 적합한 장치로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이러한 장치는 충동이 드러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문화산업이 제시하는 모델을 따르고 있다. 인간의 내밀한 반응들조차 스스로에게까지 철저히 물화되어 있기 때문에 고유한 개성이라는 이념조차 극도로 추상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개성이란 번쩍이는 흰 이빨이나 겨드랑이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 것 또는 감정이 전혀 없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문화산업에서 선전이 승리했다는 것과, 소비자들은 상품을 꿰뚫어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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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 지성사, (2001) [본문으로]
  2.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 지성사, (2001), pp.215 [본문으로]
  3.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 지성사, (2001), pp.25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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