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학술

[도서 리뷰 정리] 장 자크 루소J.J. Rousseau / 『사회계약론』 / 범우사

by Radimin_ 2017. 1. 2.
반응형

- 목 차 -

1. 루소의 ‘사회계약’

2. 일반의지(一般意志), 특수의지, 집단의지

3. 주권의 한계

4. 정부와 주권자

5. 시민집회

6. 시민의 종교

7. 마치며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각주:1]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정치학의 고전으로 불린다. 300여 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은 국가의 발생과 정부, 시민, 주권, 통치자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과 분석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비단 정치학도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민주시민들이 반드시 필독해야할 고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특정 국가에 속하여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란 무엇인지, 국가는 어떻게 발생하는 것인지, 국민을 규율하는 법률과 공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는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국가의 주권자라 일컬어지는 민주시민이 주권과 국가의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한 민주시민이라 할 수 없을 것이고, 다만 그러한 껍데기를 뒤집어 쓴 종속인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국가와 주권에 대해 이해하고 그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민주시민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국가의 시민으로 태어나 주권자(主權者)의 일원인 나의 발언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정치를 연구할 의무가 충분히 지워져 있는 것이다.”[각주:2]



올바른 국가와 최선의 정부는 무엇인가? 문제에 대해선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그 사회에 속한 주권자인 시민들이 충분한 고민과 합의를 통해 그들만의 답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루소의 논의를 통해 주권에 관한 심도 있는 고민을 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 루소의 ‘사회계약’


이 저서의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국가란 사회계약에 의해 탄생하는 인공적 실체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홉스, 로크 등 다양한 지식인들이 논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의 관점은 실로 다양하다. 예컨대 홉스는 국가 이전의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라고 규정하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모두가 모두에게 적이 됨으로써 결국 만인이 생명의 위협과 공포에 빠져들게 된다고 본다. 이러한 위험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인간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힘을 모아 가상의 주체에게 양도함으로써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는데 이를 통해 탄생하는 거대한 실체가 바로 리바이어던, 즉 국가라고 홉스는 보고 있다.



그러나 루소는 홉스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자연상태는 결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가 아니며 자연상태에 놓인 인간은 서로에 대하여 결코 적이 아니다.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다. 다만 각각의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이해의 충돌을 규율할 법률과 사회 체계가 구비되어 있지 않아 서로의 이익이 침해될 가능성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개별 인간들은 각자의 이익과 소유를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보장받기 위해 함께 모여서 사회계약을 체결한다. 즉 홉스의 관점에서 국가를 형성하는 사회계약의 동기가 각각의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위협에 대한 공포라면, 루소의 관점에서 사회계약의 동기는 자기와 자신의 이익에 관해 보장받고자 하는 동기인 것이다. 



더불어 홉스의 사회계약은 리바이어던에게 자기에 대한 주권과 자유를 완전히 양도하는 형태임에 반해, 루소의 사회계약은 엄밀한 의미에서 홉스의 양도와는 다르다. 사회계약이 체결될 때 각인은 공동체에게 자신의 주권과 자유를 양도하긴 하지만, 그러한 양도계약은 사실 자기 자신과의 계약이다. 계약을 통해 각인은 공동의 주권자가 되고 주권과 자유는 공동체의 주권자로 변모한 각인에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즉 사회계약을 통해 달라지는 것은 모두가 한데 모여 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자연상태의 인간에서 공동의 주권자로 변모한다는 점이다. 루소의 논의에 따르면 주권과 자유는 홉스의 논의와 같이 리바이어던이라는 거대주체에게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각자는 전체에게 자기를 양도하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자기를 양도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리고 모든 구성원은 자기가 양도하는 것과 똑같은 권리를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받기 때문에, 각자는 자기가 상실한 모든 것과 동등한 가치의 것을 얻고 나아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존하기 위한 더 많은 힘을 얻는다.”[각주:3]



사회계약을 통해 창출되는 권력은 힘이 아니라 약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약속을 통해 확립된 권력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그 권력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 따라서 전제군주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전제정부는 정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민에 대하여 어떠한 권리도 가질 수 없으며, 시민은 그 어떤 의무도 지지 않는다.



“어떤 전제정부(專制政府)가 정당한 것이기 위해서는, 각 세대마다 인민이 자주적으로 그것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정부는 이미 전제적인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각주:4]



루소는 자신의 전제와 결론을 바탕으로 사회계약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한다.



“구성원 전체의 공동의 힘으로 각자의 신체와 재산을 방어하고 보호하며, 각 개인은 전체에 결합되어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밖에 복종하지 않고, 이전과 같이 자유로울 수 있는 하나의 결합상태를 발견하는 것”[각주:5]



2. 일반의지(一般意志), 특수의지, 집단의지


‘일반의지’는 루소의 사회계약 논의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개념이다. 그러나 정작 루소 자신은 일반의지에 대하여 명확한 정의를 내지리 않았기 때문에 일반의지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오늘날에도 다양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단 일반의지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고찰해보기 전에 루소는 일반지의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들 각자는 자기의 신체와 모든 힘을 공동의 것으로 하여 일반의지의 최고 지도 아래 맡기고ㅡ그런 정치 조직 속에서ㅡ우리 모두는 각 구성원을 전체 가운데 불가분한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각주:6]



여기서 언급된 일반의지는 일단 주권자의 의지임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사회계약을 통해 탄생한 국가를 최고의 지위에서 지도할 수 있는 것은 곧 국가의 주인인 주권자의 의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의 주권자란 특정인이 아니라 그 계약을 통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구성원이므로 일반의지는 개별적인 인간의 특수의지와 구별된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그러나 루소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일반의지와 집단의지를 구별한다. 모든 구성원이 표출하는 집단의지가 곧 일반의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일반의지는 분명 집단의지이지만, 집단의지를 일반의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루소는 일반의지를 공공이익을 추구하는 의지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일반의지와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집단의지란 개별적 인간들의 특수의지가 한데 모여 집단을 이룬 것에 불과하다. 특수의지란 공공이익이 아닌 개별 인간의 사적이익이며, 이러한 사적이익이 모여 집단의지를 구성한다면 그것은 뭉쳐진 특수의지일 뿐 일반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논란의 여지가 발생한다. 



루소는 공공이익과 사적이익을 완전히 분리시키고 있다. 하지만 공공이익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사인에게도 이익이 되며 개인의 차원에서는 사적이익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공공이익이 개인적 차원에서 사적이익으로 표현될 수 있다면 역으로 사적이익이 모여 집단의지를 구성하는 것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의미로서 공공이익을 추구하는 일반의지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필자가 보기에 루소가 집단의지와 일반의지를 엄격하게 분리하고 있는 것은 의지의 문제에 대하여 표면적인 이익의 차원이 아닌 내면적인 의도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어떤 집단의지가 결과적으로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 해도 그 이익을 추구하는 개별 인간들의 의지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이것은 곧 특수의지의 집합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 형성된 집단의지는 다양한 형태의 사적이익과 특수의지가 우연한 기회를 통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집단을 이룬 것이다. 즉 그 집단의지를 개별적인 특수의지로 분해해보면 분해된 특수의지들은 각각 다른 의도와 다른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어떤 집단의지가 일반의지라면, 그 의지를 분해한다고 해도 특수의지로 환원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의지란 사적이익보다 공공이익을 우선시하는 의지이고, 공공이익이란 결국 한 가지 형태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데 뭉친 일반의지를 개별적으로 분해한다고 해도 그 분해된 의지 또한 일반의지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일반의지는 그것이 집합되거나 혹은 집합되지 않거나를 떠나서 공공이익을 추구하는 의지이며, 이러한 의지는 집합 이전에 이미 모두와 동일한 것이다.



즉 일반의지에 대해서 이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일반의지는 각각의 의지가 모여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이익을 우선시함으로써 그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집합의지이든 특수의지이든 그것이 사적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에서 공공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변모한다면 그것은 곧바로 일반의지의 단계로 격상되는 것이고, 모두의 의지가 반영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공공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데서 온 것이 아니라면 일반의지라 볼 수 없다. 루소는 일반의지를 언제나 올바른 의지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은 얼핏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모두의 의지라 하더라도 그릇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행한 일반의지의 해석에 따르면 루소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일반의지는 무에서 유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여 발견되는 것이고 또 도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의지와 일반의지 사이에는 때때로 큰 차이가 있다. 일반의지가 공동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것인데 대하여, 전체의지는 개인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특수의지의 합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 특수의지로부터 지나친 것과 모자라는 것을 상쇄하면, 그 차이의 합계로서 일반의지가 남는다. 인민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어떤 문제를 의결하려고 할 때, 일부 시민들이 사전에 어떤 편파적인 이익을 담합하지 않는다면, 그들 간에 생기는 작은 의견 차이의 총계에서는 항상 일반의지가 생겨나고 따라서 그 의결은 항상 올바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파가 생겨나고 이러한 부분적 집단이 정치체라는 큰 집단을 희생시켜 형성될 때, 각 부분적 집단들의 의지는 그 구성원에 대해서는 일반의지가 되지만 국가에 대해서는 특수의지가 된다.”[각주:7]



3. 주권의 한계


주권은 일반의지에 의해 지도되는 권력이다. 그러므로 주권은 개별 인간의 특수의지나 사적이익에 의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일반의지에 의해 지도되는 권력이라고 해서 주권에 한계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은 주권을 담지하고 있는 시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인간으로서의 개별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개별적인 인간은 사회계약에 의해 형성된 주권과 더불어 인간으로서 향유해야할 자연권이 있다. 비록 사회계약에 의해 국가가 주권의 행사에 필요한 강력한 공권력을 갖게 되지만 이는 일반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공권력이 되어야 한다. 즉, 신성불가침의 주권이라 해도 개별 인간의 자연권을 침해할 수는 없으며 이것이 바로 주권이 가지는 한계가 된다. 개별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연권은 사회계약의 과정에서 온전하게 보장될 것이라 약속되었기 때문에 주권은 이 약속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국가가 공권력을 행사할 때 그것이 가지는 강제력은 이 약속의 한계 내에서 행해져야 한다. 



4. 정부와 주권자


여기에서 우리는 국가와 주권자, 그리고 정부를 엄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국가란 개별 인간들이 사회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형성된 공적주체이다. 그리고 이 공적주체를 형성한 개별 인간들은 각자가 자신의 주권을 이에 양도함과 동시에 주권자가 됨으로써 되돌려 받는다. 그렇다면 정부는 무엇일까?



주권자에게는 스스로를 규율할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입법권이 있다. 입법권은 일반의지의 행사이다. 입법권을 통해 제정된 법률은 결국 주권자가 제정하고 주권자에게 적용되는 것이기에 주권자는 그 누구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법은 제정되는 것만으로 실효성을 발휘할 수 없다. 법이 실효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집행행위가 결부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법의 집행은 주권자 모두가 감당할 수 없다. 그것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일이며,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권자는 집행권을 특정 집단에게 위임한다. 이렇게 주권자로부터 집행권을 위임받는 주체가 바로 정부이다.



정부는 역사적으로 통치자, 왕, 군주, 행정관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일컬어져왔다. 정부에 대한 그 어떤 명칭이든 여기서의 본질은 정부와 시민 간의 관계가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닌 주인과 대리인의 관계라는 점이다. 정부는 그들에게 위임된 권력을 주권자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 시민이 법률을 제정하는 주권자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이 제정한 법률에 복종하는 신민임을 고려할 때, 정부는 바로 주권자와 신민 사이에서 법률을 집행하고 사회적, 정치적 자유를 유지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권자와 정부, 신민 사이의 비례관계가 정치체를 온전하게 유지해나가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주권자는 일반의지의 지도에 따라 주권을 행사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정부는 주권자의 명령을 충실히 집행하며, 신민은 제정된 법과 법의 집행에 따를 때 세 주체 간 비례관계는 균형을 이룬다. 이러한 비례관계를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정부의 구성이 중요하다. 주권자와 신민은 사실상 일체이며 바뀔 수 없는 것이지만, 정부는 사회구성원의 합의에 따라서 무수한 형태를 띨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사회의 습속과 제반조건들을 고려하여 이에 맞는 적절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루소는 긴 논의를 통하여 정부의 형태들(민주정, 귀족정, 군주정, 혼합정)에 관하여 고찰하고 이들이 갖는 특성과 장단점을 분석한다. 이에 대한 견해는 각각의 학자들마다 의견을 달리하고 있으므로 다양한 관점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루소의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정부가 결코 주권자로부터 주권을 양도받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주권자로부터 고용되었을 뿐이며, 정부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권자의 이름을 걸고 대신 행사하는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정부와 주권자, 신민의 관계는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아닌 주인과 대리인이라고 보는 관점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5. 시민집회


루소는 온전한 정치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정기적인 시민집회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시민집회는 일반의지의 표출과 발현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정치적 장이다. 비록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입법권이 주권자의 대표자들인 의회에 의해 대리되고, 법률의 집행이 정부에 의해 대리된다 할지라도 정치체를 구성하는 모든 시민이 곧 주권자라는 점은 불변하기에 시민집회는 곧 주권자의 권리이자 의무인 셈이다. 



만약 정부가 시민집회를 탄압하거나 금지한다면 그것은 대리인이 주인에 대하여 반역하는 꼴이 된다. 주권자의 이름으로 주권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신성한 의무를 금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집행권에서 주권자의 이름을 정부가 찬탈하고 그 자리를 대신 꿰차는 행위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또한 시민 스스로가 집회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거나 이상한 편견을 내면화한다면 이는 주권자 스스로가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혐오하고 내버리는 셈이 된다. 이는 스스로 자신의 공복을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세워놓고 스스로에게 목줄을 채워 그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다. 이 경우 주권자는 자신의 대리인인 정부에 예속되고 그가 갖고 있던 권리와 의무는 공권력에 대한 복종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질서가 잘 잡혀 있는 나라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집회에 모여들지만, 나쁜 정부 밑에서는 이무도 집회에 나가려고 발을 떼어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거기서 행해질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고, 또 거기서는 일반의지가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미리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모두 가사(家事)에나 몰두할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법률은 점점 더 좋은 법률을 만들어내고, 나쁜 법률은 점점 더 나쁜 법률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만약 누군가가 국가의 사무에 대하여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한다면, 그 국가의 운명은 이미 끝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각주:8]



6. 시민의 종교


루소는 진정한 주권자로서의 시민의 정치적 의식을 자각시키고 유지시키기 위하여 시민의 종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종교란 말 그대로 종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국가라는 공동체 그 자체를 위한 종교를 뜻하기도 한다. 시민의 종교가 이와 같다고 해서 국가가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시민들이 주권자로서 주권의 신성함에 대해 인지하고 선량하고 신실한 시민이 되기 위하여 요구되는 사회적 감정에 가까운 것이다. 



“주권자가 그 항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순수한 시민적인 신앙 고백이 필요하다. 이때 주권자가 결정하는 항목이란 종교의 교의로서가 아니라 선량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나 충실한 신민이 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사회적 감정으로서 요구되는 항목이다. 주권자는 이런 항목을 믿도록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국가로부터 추방할 수는 있다.”[각주:9]



루소의 시민의 종교에 따를 때, 만약 특정 계층이 이를 어기고 위임받은 권력을 남용하여 자신의 특수의지를 사회에 관철하고 공공이익을 훼손하여 사적이익을 도모한다면 주권자인 시민은 그 자들로부터 권력을 박탈하고 국가로부터 추방할 수 있을 것이다. 



7. 마치며


극히 불완전하게나마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정리해보았다. 2016년, 대한민국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앙에 가까운 국정농단 정치파국에 대하여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시민들이 담지하고 있는 주권이 시민들의 손에서 벗어나 특정 세력에 의해 남용되고 주권자가 일개 공복인 행정관에 의해 ‘개돼지’로 취급되며, 대리인인 대통령이 자신의 특수의지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국민들의 일반의지와 인간으로서의 자연권마저 처참하게 내팽개친 상황이 바로 루소식으로 표현한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아닐까 싶다. 감히 주권자에 대하여 반역을 꽤한 국정농단의 모든 용의자들은 주권자의 이름으로 추방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다행하게도 우리 국민들의 시민의식은 각성하고 있다. 현명하고도 성실하게 자신의 주권을 깨우쳐가고 있는 우리 국민들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다.



  1. 장 자크 루소, 이태일(외) 역, 『사회계약론(외)』, 범우사, (1994) [본문으로]
  2. 장 자크 루소, 이태일(외) 역, 『사회계약론(외)』, 범우사, (1994), pp.14 [본문으로]
  3. 장 자크 루소, 이태일(외) 역, 『사회계약론(외)』, 범우사, (1994), pp.29-30 [본문으로]
  4. 장 자크 루소, 이태일(외) 역, 『사회계약론(외)』, 범우사, (1994), pp.23 [본문으로]
  5. 장 자크 루소, 이태일(외) 역, 『사회계약론(외)』, 범우사, (1994), pp.29 [본문으로]
  6. 장 자크 루소, 이태일(외) 역, 『사회계약론(외)』, 범우사, (1994), pp.30 [본문으로]
  7. 장 자크 루소, 이태일(외) 역, 『사회계약론(외)』, 범우사, (1994), pp.44 [본문으로]
  8. 장 자크 루소, 이태일(외) 역, 『사회계약론(외)』, 범우사, (1994), pp.122 [본문으로]
  9. 장 자크 루소, 이태일(외) 역, 『사회계약론(외)』, 범우사, (1994), pp.179 [본문으로]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