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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학술

[도서 리뷰 정리] 피에르 부르디외 / 『텔레비전에 대하여』 / 동문선

by Radimin_ 2016.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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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의 『텔레비전에 대하여』[각주:1]



이 책은 1990년대의 지배적인 미디어 매체였던 텔레비전이 갖는 구조적 메커니즘과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을 다룬 책이다. 필자는 이 책을 저널리즘이나 방송계 종사자, 혹은 이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1독해야할 미디어 매체 비평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은 텔레비전 이외에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 등의 첨단 매체가 등장하여 더 이상 텔레비전이 지배적인 매체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더불어 최근 등장한 첨단 미디어 매체들이 텔레비전의 메커니즘과 속성과 무관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텔레비전의 메커니즘을 계승하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는 점에서 부르디외의 텔레비전 매체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부르디외는 과연 이 책을 통해 텔레비전의 어떠한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텔레비전은 학문, 예술을 망라한 문화생산의 장의 고유한 자율성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자율성도 정치적, 상업적 논리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텔레비전 매체의 상징조작 능력과 공중(公衆)에 대한 접근성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현한다. 공중에 대하여 압도적 영향력을 보유한 텔레비전은 정치적 논리와 상업·경제적 논리라는 이중적 구속에 직면해있다. 정치, 경제적 논리에 종속되어있는 텔레비전이 공중에 대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텔레비전이 공중과 사회 각계를 효과적으로 조작하기 위한 정치, 경제적 논리의 효과적 도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민주적 매체라고 여겨지는 텔레비전이 실은 민주적 요소를 훼손시키는 체계 권력의 매개체임을 뜻한다. 


공중은 텔레비전을 통해 사회를 이루는 모든 차원에 접근할 수 있지만, 그 접근 방법은 철저히 텔레비전의 영향력 아래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공중은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에 한층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에 ‘의해’ 세계에 대한 해석을 강요당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에 민주적인 표현방식이 결여되어있다고 말한다. 텔레비전은 직접민주주의의 효과적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공중에 대한 상징적 억압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의 실태가 후자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미디어 권력에 우려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텔레비전은 어떤 방식으로 공중과 세계에 대하여 상징적 폭력을 행사하는가?



■ 문화의 통속화


시청률의 논리에 종속되어있는 텔레비전은 필연적으로 선정성과 자극성을 통해 공중의 흥미를 자극하여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텔레비전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극화를 통해 흥미의 요소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각색하여 공중에게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현실은 텔레비전이 구성한 이미지와 상징이 된다. 공중에 대한 텔레비전의 압도적 영향력으로 인해 사회의 각 차원들은 텔레비전의 존재와 기능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을 통하지 않고서는 공중에게 다가서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과학계에서 아주 뛰어난 연구결과를 산출했다 하더라도 텔레비전의 보도를 통해 이슈화되지 않는다면, 민간의 투자와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 이는 학계, 예술계, 문화생산의 장은 물론이고 정치의 장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텔레비전의 힘은 미디어 권력이 되어 사회 각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들은 시청률의 논리에 따라 자신들이 보도할 문제를 선택하고 검열하며, 최대한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각색한다. 


이러한 각색과 상징화 과정 속에서 각 계의 자율성은 현저하게 훼손된다. 텔레비전에 의해 선별되는 것은 중요하고 뛰어난 것들이 아니라 ‘흥미를 끄는 것들’이다. 아무리 뛰어나고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텔레비전의 신속 간결한 보도 방식으로 다루기에 적합하지 않고, 공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성질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선택되지 않는다. 보다 단순하고 보다 명쾌한, 보다 자극적인 사소한 문제들이 텔레비전의 입맛에 맞는 것들이다. 미디어 권력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각 문화생산의 장들은 텔레비전의 요구에 맞춰 사소한 것들을 생산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이를 통해 문화생산의 영역은 통속화되어 버린다.



■ 공중의 탈정치화


공중들은 텔레비전이 보도하는 산만하고 사소한 문제들을 시청한다. 통상 그러한 뉴스거리는 1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 다뤄지기 때문에 사소한 뉴스거리들의 연쇄는 사람들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단지 ‘관람’하게 만든다. 공중의 세계를 향한 시선이 점차 ‘관람’의 형태로 굳어지면 사람들의 심사숙고 능력은 퇴화되어버린다. 이는 민주적 능력의 퇴화로 이어진다. 정치적 문제는 복잡한 이해관계의 사슬을 토론을 통해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심사숙고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단편적이고 산만한 이슈들에 익숙해진 공중들은 더 이상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집중하고 토론하기 힘들어진다. 이 점에서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엔 민주적인 표현이 결여되어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건 사고는 정치공백화 현상을 만들고, 사회적 삶을 탈정치화 시키며, 일화나 소문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각주:2]



■ 저널리즘의 동질화


독점은 획일화를 가져오고 경쟁은 다양화를 가져온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저널리즘의 장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오히려 저널리즘의 경쟁은 미디어의 동질화를 가져온다. 


뉴스라는 생산물은 생산되자마자 금세 사라져버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기자들은 가장 최근의 뉴스를 선취하려는 경쟁 속에 내몰린다. 그리고 특정 매체의 보도를 통해 이슈화된 뉴스에 대하여 다른 매체의 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해당 이슈에 편승하면서 단지 미세한 차이를 생산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입장과 색깔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나 공중들은 이 미세한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동일한 이슈에 대하여 다양한 매체의 뉴스를 비교 검토하는 것은 오직 방송계 종사자나 해당 이슈와 관련된 전문직업인뿐이다. 기자와 매체들은 자신들이 생산해낸 미세한 차이가 뉴스의 다원화를 가져온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 공중들이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은 동일한 뉴스, 동일한 이슈, 동일한 목소리일 뿐이다. 미디어의 효과는 공중들을 대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저널리즘 내의 경쟁은 결국 미디어의 획일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부르디외의 저널리즘 경쟁에 대한 비판은 일면 기자들을 향한 비판으로 읽힐 수 있지만, 이는 부르디외의 글을 오독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저널리즘과 미디어의 선택행위에는 주체가 없다. 표면적으로는 기자들이 뉴스거리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저널리즘의 구조적 메커니즘이 기자들의 선택을 강요한다. 기자는 단지 그 메커니즘이 필연적으로 지시하게될 문제에 대하여 다른 기자들보다 더 빠르게 그 지시를 수행할 뿐이다.



■ 정치적 장(場)에 대한 미디어의 간섭효과


정치적 장은 토론과 절차를 통해 정책을 산출하는 일종의 투기장이다. 정치는 법적으로 규정된 고유의 규칙과 논리, 절차에 따라 정책을 산출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자극적, 선정적 보도는 시청자 공중의 감정을 자극하고 공중들로 하여금 정치적 장에 강력한 외부적 압력을 가하도록 만든다. 이를 통해 정치적 장의 내부적 규율과 절차는 미디어의 작용과 압력에 의해 침해되고 만다. 


더불어 정치적 영역에서 다뤄져야할 사회 전반의 수많은 문제들은 미디어의 이슈화능력과 지시작용에 의해 사각지대로 물러나버린다. 특정 이슈에 주의와 관심이 집중됨에 따라 주목받지 못한 수많은 중요한 사안들에 대한 감시와 조정이 후순위로 밀려난다. 이로 인해 비가시적 영역이 되어버린 곳에서 구조적 결함과 모순이 축적되어 수많은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텔레비전에서 강조하는 ‘민주성’이란 사실 그들이 주목하고 각색한 문제에 대하여 격앙된 공중의 모습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적으로는 사회의 민주적 운용과 발전을 저해시켜 민주주의의 참된 이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 종합


텔레비전은 일반인들이 사회 각계의 특수한 자율적 장(場)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텔레비전은 특수한 영역의 모습을 고루 비춰줌으로써 시청자 공중들과 작가, 예술가, 학자 등의 문화생산자들을 동등한 선상에 위치시킨다. 이는 인류의 문화적 자산들을 일반 공중에게 고루 분배해준다는 점에서 일면 긍정적 기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공중은 평준화를 위협적으로 요구하는 경향이 짙다. 이는 문화의 각 영역에 존재하는 심층적 기반을 점차 약화시켜 문화적 발전을 저해시킨다. 


텔레비전이 사회를 이러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은 텔레비전이 정치적 논리와 상업적 논리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권력이 되어 정치적, 상업적 논리의 도구로서 활용되는 이상 미디어 권력에 의한 문화생산 영역의 자율성 침해는 극복하기 힘든 문제가 되어버린다.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의 부정적 메커니즘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정치, 상업적 논리에 타율적인 언론인과 지식인들과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디어는 더 이상 긴급성이나 선정성 등에 의해 전적으로 휘둘릴 것이 아니라, 토론과 심사숙고의 영역을 만들고 유지해나가면서 저널리즘의 자율성을 배양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한다. 저널리즘이 이중적 구속으로부터 자율성을 갖게 될 때, 문화생산의 장들 또한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텔레비전에 대한 부르디외의 통찰력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미디어 매체가 다양화되고 지배적인 매체가 다른 것으로 전환되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저널리즘의 메커니즘과 구조는 여전히 그 형태를 유지하며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와 언론은 현대사회를 움직이고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 가운데 하나이다. 현대사회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는 이상 미디어와 언론의 문제는 더 이상 언론인이나 정치인, 학자들만의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텔레비전을 넘어 스마트폰의 형태로 우리의 삶 속에 더더욱 밀착되어가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이 책은 사람들이 민주시민으로서 자질을 유지해나가기 위한 중요한 지식을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 피에르 부르디외, 현택수 역, 『텔레비전에 대하여』, 동문선, (1998) [본문으로]
  2. 피에르 부르디외, 현택수 역, 『텔레비전에 대하여』, 동문선, (1998), pp.8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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