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메모들 1

Posted by 딤레인
2016. 8. 12. 07:00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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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솔직함. 이것이 오히려 가장 고도화된 거짓이 될 수도 있다. 분별없이 솔직한 사람은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 진실을 가장 깊은 심연 속에 감춘다. 그것은 비밀방의 입구를 벽으로 메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벽을 허무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비밀방의 내부는 외부에 공개된다. 동시에 그곳이 비밀방이라는 진실이 은폐된다. 비밀이 비밀일 수밖에 없는 ‘중대함’은 이 경우 완전히 감춰진다. 이제 사람들은 그 ‘비밀’에 주목할 수 없다. 공개된 비밀은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진실들 중 하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솔직함은 비밀을 공개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비밀을 감춘다. 그 비밀이 반드시 감춰져야할 비밀이라는 진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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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향한 최고의 칭찬과 아첨은 바로 그 사람 앞에서 오만과 좌절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말을 통한 아부는 의심을 살 위험이 있다. 오만이 없는 자기비하는 때때로 오만보다 더 큰 불쾌감을 준다. 

진정 그의 기분을 띄워주기 위해서는 그가 스스로 당신을 짓밟을 여지를 주어야한다. 오만한 도전으로 그의 투지를 자극하라. 그리고 동정심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무너져라. 그 뒤에 날아오는 그의 발길질에 적당히 저항하라. 이 때 중요한 것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급소를 빗나가는 당신의 칼을 슬쩍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엔 납작 엎드려 그를 인정하고 칭찬하라. 이러한 단계를 거치고 나면 당신은 그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음과 동시에 당신을 존중하고 있는 그 사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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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지지 않으려고 발 앞에 놓인 온갖 장애물들을 치우는 데 집중하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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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타래가 복잡하게 얽혀서 풀어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그 실타래에 불을 붙여보자. 불타며 피어오르는 연기는 그렇게 시원스레 풀어질 수 없다. 다만 이 경우 그 실을 사용하는 것은 단념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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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를 매개로 한 거래행위는 주고받는 과정 가운데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수치심을 흡수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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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는 판매자에 비해 언제나 불리하다. 구매자는 상품의 가치에 상응하는 돈을 지불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돈에는 그 상품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구매자는 잠재적 가능성을 확실화된 불가능성과 교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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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에서 구체적인 정신질환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 소설의 작가가 얼마나 게으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지가 된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이는 거의 옳다. 정신질환이라는 진단이 한 인물의 생을 얼마나 잔혹하게 재단하고 난도질하는지 세심한 주의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작가가 등장시킨 정신질환의 병명이 구체적일수록 그는 더욱 나태한 작가이다. 그는 정신질환을 이용함으로써 한 인간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질환의 프로토타입을 베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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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쪽 발목을 안쪽으로 접질려본 사람은 걸음걸이에서 양 발목을 안쪽으로 모아 걷는 경향이 생긴다. 끔찍한 경험으로 인한 공포심이 신체에 무의식의 형태로 각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불균형이 축적되면 또 다른 신체적 상해를 발생시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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