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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학술

[도서 리뷰 정리] 막스 베버 /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世界(세계)

by Radimin_ 2016.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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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1. 들어가며

2. 베버의 문제의식 –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의 관련성

3. 자본주의 정신의 해부

4.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로서의 프로테스탄티즘

5. 프로테스탄티즘의 성격 - 예정설

6. 프로테스탄티즘의 부(富)에 대한 입장

7. 프로테스탄티즘와 자본주의적 수익성

8. 베버의 정식화

9. 나오며 - 베버의 논의가 갖는 의의





1. 들어가며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각주:1]



막스 베버는 1864년 독일에서 태어나 1920년 5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법률학,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 철학을 두루 섭렵한 사회학자이다. 



관료제론으로 유명한 그의 이론은 당시 자본주의와 서구근대국가의 근원을 통찰하였다는 점에서 사회학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비록 오늘날은 관료제가 관료주의와 함께 부정적 뉘앙스를 지닌 용어로 통용되고 있으나 그의 통찰만큼은 여전히 학문적으로 의의가 크다. 사회학뿐만 아니라 정치학, 행정학, 정책학 등에서 막스 베버의 이론은 한번 쯤 짚고 넘어가야 할 정도로 그의 학문적 위치는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막스 베버는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가 어떻게 하여 서구문명에서 발흥할 수 있었는지 그 연원을 추적하는데, 이 연구 결과 그가 내린 결론은 서구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자본주의의 정신적, 윤리적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이란 기존의 정통 카톨릭과 대비하여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이후 부상하게 된 신흥종교사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막스 베버의 결론에 관하여 하나의 의문이 들 수 있는데, 개인의 부에 대한 욕망과 소유권을 주요 원리로 하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하는 종교사조와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그것이다. 종교, 특히 기독교적 윤리는 그것이 정통 카톨릭이든 프로테스탄티즘이든 내세를 추구하고 사치를 배격하며 비세속적인 가치를 공히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독교 윤리가 어떻게 자본주의 정신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인가?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의 심층적 원리를 분석하고 역사적 고증을 통해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간의 연결고리를 낱낱이 밝히면서 이러한 의문에 답하고 있다. 




2. 베버의 문제의식 –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의 관련성


먼저 베버는 19c말 20c초에 존재했던 근대적 기업의 상층계급들, 부르주아 중산 계급에서 프로테스탄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로부터 베버는 다음의 가설을 세운다. 


“비세속적, 금욕적이기 때문에 신앙이 깊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영리생활에 종사한다는 것은 결코 대립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내면적인 친화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볼만 하지 않은가?”[각주:2]



3. 자본주의 정신의 해부


이러한 가설을 출발점으로 하여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은 금전욕이 아니라 경제적 합리성이다. 금전욕이라는 것은 자본주의가 태동하기 이전부터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인간에게 존속하고 있던 물적 욕망이다. 따라서 금전욕 그 자체를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전(前)자본주의적이라는 것은 금전욕과는 무관하게 합리적 자본증식과 합리적 노동조직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에서 금전욕을 배제함으로써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적 성격과 자본주의의 영리추구적 성격 사이에 가로막혀있던 탐욕이라는 장벽을 제거한다. 이로부터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가 연결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마련된다.



4.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로서의 프로테스탄티즘


베버에 의하면 이 시기에 새로이 부상한 자본주의적 기업경영가는 기존의 방만하고 향락추구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세속귀족, 세속부자, 졸부들의 정신과 구별되어 냉정한 극기를 유지하고 강고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이러한 태도가 합리적인 자본주의 정신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노동자들도 기본의 안이한 목적과 단순한 밥벌이로 생각하던 전통적 태도를 벗어나 노동 자체를 자기 목적으로 삼고 하나의 사명을 띤 직업으로 받아들여야만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걸맞는 노동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기업가와 노동자 정신을 고양하는데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금욕주의가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것이 막스 베버의 핵심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자본주의 정신을 고양시킨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란 과연 무엇이었는가?



5. 프로테스탄티즘의 성격 - 예정설


프로테스탄티즘은 루터와 캘빈(칼뱅)의 종교개혁을 통해 발전하였다. 여기서 프로테스탄티즘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예정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예정설의 핵심은 신에 의해 세상이 창조되었을 당시에 이미 신에 의해 구원될 자와 버러질 자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 이외의 어떤 존재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비관적인 관점이 깔려있다. 이 교리에 의하면 신이 아닌 이상 누가 구원받고 누가 버림받을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단지 신이 선택하신다는 깨달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강건한 믿음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과연 신에게 선택받은 자인지 의문을 품게 된 이상 믿음 자체가 구원을 증명한다는 모호한 방식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은 예정설의 최초 형태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게 된다. 



“끊임없는 직업노동이 그러한 자기확신을 획득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서 엄격하게 권고되었다. 즉, 직업노동에 의해서만 종교상의 의혹이 사라지고 은혜의 확실성이 주어진다는 것이다.”[각주:3]


“직업노동은 발군의 금욕적 수단이었다. 즉 신 자신이 노동의 성과를 통해 그가 선택한 자에게 축복을 주신다는 점은 (중략)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각주:4]



6. 프로테스탄티즘의 부(富)에 대한 입장


그러나 직업노동의 결과 발생된 ‘부(富)’라는 것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인류가 발전시킨 대부분의 종교에서 경계의 대상이었다. 부는 인간의 탐욕을 부채질하고 온갖 악덕과 이기주의를 배양함으로써 인간을 정신적으로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도 여타 종교와 마찬가지로 부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낸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의 우려는 ‘부(富) 그 자체’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부의 소유로부터 파생되는 육욕과 무위도식이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구별되며 한층 구체적이다. 



즉 아무리 부유한 자라도 그의 부유함이 육욕과 무의도식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이 경우 부라는 것은 직업노동에 금욕적인 태도로 충실히 임한 결과 신이 그에게 내려준 하나의 은혜이므로 구원의 징표가 된다. 



“부유한 자들이라도 노동하지 않고 먹어서는 안 된다. (중략) 직업은 그가 복종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숙명이 아니라, 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라는 신의 명령인 것이다.”[각주:5]


“부는 게으름과 죄많은 향락에의 유혹일 경우에만 윤리적으로 사악한 것이며, 부의 추구로 근심없는 안일한 삶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만 사악한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직업의무의 수행으로서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명령되는 바이다.”[각주:6]



7. 프로테스탄티즘와 자본주의적 수익성


프로테스탄티즘은 여기서 더 나아가 직업종사뿐만 아니라 부의 축적 그 자체가 신의 명령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직업의 유익함 정도(신을 기쁘게 해 드리는 정도)는 우선 도덕적 문맥과 공동체의 이익, 그리고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지는 재화의 중요성이라는 문맥 속에서 측정된다. 이와 더불어 ‘수익성’측면에서도 그 직업의 유익함 정도가 결정된다. 왜냐하면 신이 어떤 사람에게 이득의 기회를 주신다면 그는 신의 명령에 충실히 응답하여 그에 걸맞는 수익을 창출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너에게 내가 너의 영혼이나 타인의 영혼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다른 방법으로 더 많은 이득을 적법하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데도 네가 이것을 거절하고 이득이 덜한 방식을 선택한다면, 너는 신의 소명 가운데 하나를 거역하는 것이고 신의 관리인이 되어 그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따라서 신의 요구가 있을 때 신을 위해 그 선물을 선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너는 육욕이나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신을 위해 부유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각주:7] (Baxter, 『Works of the Puritan Divine』, I, 10장, 1, 9(par.24) ; I, pp.378, 2 재인용)



8. 베버의 정식화


이상의 논증을 통해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고양시켰다’라고 하는 자신의 가정을 정식화시킨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영리활동에 대한 프로테스탄티즘의 도덕적 정당화는 금욕주의를 통한 소비의 제한과 연결되면서 영리활동과 금욕적 절약의 강제를 통한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독특한 부르주아 경제윤리가 출현한 것이다. 부르주아 기업가는 신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서서 그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느끼며, 그가 형식적인 올바름의 틀을 지키는 한, 그리고 그의 도덕생활이 깨끗하며 그의 재산이 온전하게 사용되는 한 금전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며, 또한 그가 그렇게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종교적 금욕의 힘은 그에게 건전하고 양심적이고 아주 근면한 노동자들을 제공하였다. 그들이야말로 신에 의해 의도된 생활목적으로서 그들의 일에 열심히 매달렸던 것이다.”[각주:8]



9. 나오며 - 베버의 논의가 갖는 의의


베버의 결론은 이후 자본주의 정신이 자립화하고 종교적 금욕주의가 탈각됨으로써 독자적인 체계로 자리매김함에 따라 더 이상 현대 자본주의의 모습에는 적용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보드리야르가 지적했듯 더 이상 생산과 절약, 축적의 논리로 체계를 유지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소비와 향락을 부채질함으로써 자신의 체계를 공고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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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베버의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이 그 의미를 상실했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일단 그의 통찰은 자본주의의 역사와 정신적 연원을 추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주요한 역사적 관점 하나를 제시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점과 대립각을 이룸으로써 변증법적 발전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전히 인류 문명의 정신세계에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상세히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버의 논의는 여전히 중요한 학문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1. 막스 베버, 박종선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世界, (1987) [본문으로]
  2. 막스 베버, 박종선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世界, (1987), pp.33 [본문으로]
  3. 막스 베버, 박종선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世界, (1987), pp.130 [본문으로]
  4. 막스 베버, 박종선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世界, (1987), pp.148 [본문으로]
  5. 막스 베버, 박종선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世界, (1987), pp.229 [본문으로]
  6. 막스 베버, 박종선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世界, (1987), pp.231 [본문으로]
  7. 막스 베버, 박종선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世界, (1987), pp.231 [본문으로]
  8. 막스 베버, 박종선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世界, (1987), pp.24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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