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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학술

[도서 리뷰 정리]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 『일차원적 인간One-Dimensional Man』 / 육문사

by Radimin_ 2016.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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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1. 1차원적 사유와 2차원적 사유

2. 1차원적 사유와 기만적 자유

3. 1차원적 사유와 언어 조작, 정치적 세계의 종말

3. 1차원작 사유와 거짓된 욕구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각주:1]



제목이 시사하듯, 이 책은 현대사회에 만연한 일차원적 사유와 그것이 끼치는 악영향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고 있다.



묵직하고 심오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번역 상의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무튼 이 책을 독파하는데 상당히 고생했다. 완독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내용들을 놓치고 흘려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원어를 익혀야겠다는 열망이 치솟아오르는 그런 책이었다. 읽는 가운데 그나마 겨우 잡아챈 내용들을 기록하는 것으로 일단 이 책에 대해서는 접어둬야 하겠다. 



1. 1차원적 사유와 2차원적 사유


마르쿠제가 말하는 1차원적 사유란 한마디로 말해 닫힌 사유를 말한다. 



인간은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사회는 인간의 능력인 이성을 통해 고유의 언어를 구축한다. 이 언어 속에는 인간의 이성이 자연을 개념화함으로써 축조한 개념체계가 내재되어 있다. 사회에 속한 인간은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언어와 개념체계를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 인간 이성의 산물인 개념이 사회 속에서 체계화됨에 따라 사회에 속한 인간의 인식론적 틀도 이 사회에 맞춰져간다. 



그러나 개념체계는 자연을 완벽하게 반영할 수 없다. 개념은 그저 인간이 자연을 인식하기 위한 매개물에 불과할 뿐이다. 특정 사물에 대한 개념이 변화하면 그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인식도 변화한다. 이렇듯 인간의 관념 속에 자리한 개념과 인간의 외부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실 간에는 불일치와 간극이 존재한다. 이러한 개념과 사실 간의 긴장과 충돌은 개념의 변동을 야기하며 개념체계는 끝없는 변화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사실에 대한 개념의 변화는 인간 이성의 끝없는 반성과 수정의 과정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인식의 진보를 통해 인류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문명을 발전시켜나간다. 이것이 바로 사실과 개념 간의 변증법적 과정이다. 이러한 변증법은 개념과 사실이 불일치한다는 점을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이다. 테제와 안티테제의 충돌 속에서 이성은 끊임없는 반성의 과정을 거치며, 이것이 바로 2차원적 사유이자 열린 사유이다.



여기에서 마르쿠제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관적 진단을 내린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개념의 역사적, 변증법적 과정이 차단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경험론과 실증주의는 개념과 사실 간의 간극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증주의는 모든 형이상학적 관념론을 거부하고 오로지 사실 그 자체만이 남아있는 세계관을 견지한다. 즉 인간이 바라보는 세계는 사실 그 자체이며, 여기에 일체의 관념론적 해석이 가해지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로부터 인간의 개념과 인식은 변화의 가능성이 차단되고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이성은 더 이상 반성하지 않는다. 실증주의에 의하면 반성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성의 세계에선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고,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는 이성의 사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단지 일어난 사실만을 바라보면 되는 것이지 구태여 관념적 색안경을 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실증주의의 입장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쿠제가 말하는 1차원적 사유, 즉 닫힌 사유이다. 



2. 1차원적 사유와 기만적 자유


1차원적 사유는 사실과 분리되어 있는 관념들을 무자비하게 해체하여 수학적 도식 안에 집어넣는다. 인간의 사유와 감정은 호르몬이라는 물질 단위로 쪼개져 수학적 도식 안에 편입됨으로써 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물질로 환원되고, 집단적, 계급적 이해관계는 개개인의 미시적인 만족과 불만족으로 쪼개져 개별적인 치료의 대상이 된다. 1차원적 사유는 서로 대립하는 모든 가치들을 배척하기보다는 자기 내부로 편입시키는데, 이를 통해 인간 고유의 정신에 내재한 자연스런 욕망들은 무해한 물질이 되어 융화된다. 



이를 통해 현대 산업 사회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달성함과 동시에, 체계유지에 유해한 갈등들을 무해한 방향으로 통합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러한 통합과정 가운데 인간의 진정한 자율성은 체계가 정한 기만적인 ‘자유’의 모습으로 박제되어버린다.



“억압적인 전체(a repressive whole)의 지배 아래서 자유는 지배의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개인에게 열려 있는 선택의 범주는 인간적 자유의 정도를 정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개인에 의해 선택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실제로 선택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 결정적 요인이 된다. 자유로운 선택이 되기 위한 기준은, 유일 절대적인 것이 될 수는 없으나 전적으로 상대적인 것도 아니다. 주인을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해서 주인이나 노예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매우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가 고역과 공포의 생활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지속시킨다면, 다시 말해 그것들이 소외(疎外)를 지속시킨다면, 그들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 속에서의 자유로운 선택이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개인에 의해 부가된 욕구를 자발적으로 재생산하더라도 자율성이 형성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통제의 효율성을 증명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각주:2]



3. 1차원적 사유와 언어 조작, 정치적 세계의 종말


정치란 언제나 갈등을 전제하고 있다. 아무런 갈등 없이 모두가 조화되어 살아간다면 정치란 필요치 않다. 반대로 갈등이 있다면 반드시 정치가 존재해야만 한다.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정치이며, 갈등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정치가 없다면 갈등은 상호 이해 속에서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파괴의 길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1차원적 사유는 이러한 정치과정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1차원적 사유는 인간의 욕망에 기인한 수많은 갈등을 미결상태로 봉합해버리고 물질적, 사실적인 세계관 속으로 편입시킨다. 그리고 정치과정은 체계에 의해 의미를 박탈당한 수많은 상투어의 난장판으로 변화시킨다. 



“기능화되고 요약되고 통합된 언어는 1차원적 사유의 언어이다.”[각주:3]



개념과 사실 간에는 간극이 없다는 입장과 마찬가지로, 1차원적 사유는 언어와 지시대상 간의 간극을 없애버린다. 1차원적 사유 속에서는 말해진 것은 곧 말하고자 하는 그것이며 여기엔 이론의 여지가 전혀 없다. 예컨대 1차원적 사유 체계는 ‘자유’의 의미를 오직 체계가 인정하는 ‘특정 형태의 자유’에 고정시키고, 그 밖에 논의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언어가 1차원적 사유에 의해 지시대상과의 거리를 박탈당하게 되면 언어는 더 이상 토론이나 증명, 비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1차원적 사유에 의해 언어는 말해지는 것과 동시에 지시대상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슨 토론이 필요하며, 증명이나 비판이 필요하겠는가? 정치인들이 ‘자유’나, ‘평등’, ‘발전’, ‘유감’, ‘창조’ 등을 언급하면서 수많은 정치적 언설을 늘어놓지만 그 안에서 아무런 생산적인 의미를 읽어낼 수 없는 것은 그 말들이 이미 비판의 여지가 닫혀있는 상투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사회 속의 수많은 갈등들은 이러한 상투어의 홍수 속에 파묻혀 해소되지 못한 채 수면 아래 매장될 뿐이다. 



“사물의 이름은 단순히 「그것의 기능 방식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그 「실제의」 기능 방식은 다른 기능 방식을 배제함으로써 사물의 의미를 한정시키고 「폐쇄」한다. 명사가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형태로 문장을 지배하며, 문장은 받아들여진 선고가 된다.”[각주:4]


“이렇게 해서 실제로 행해지는 자유의 양식은 예속된 복종이며, 또한 실제로 행해지는 평등의 양식은 가중된 불평등이라는 사실은, 각각의 언설 세계를 형성하는 힘으로서의 이를 개념의 완결된 정의로는 표현될 수 없게 된다.”[각주:5]


“분석적인 서술은 이처럼 억압적인 구조를 갖는다. 어느 특정 명사가 항상 동일한 「설명적」 형용사와 한정사를 결부시키는 것은 그 문장을 최면술적인 형식으로 변화시키고, 이것이 수없이 반복되면 듣는 사람의 마음에 그 의미가 고착되기에 이른다. 그 사람에게는 이 명사의 본질적으로 다른 (아마도 진정한) 설명이라는 것이 생각나지 않게 된다.”[각주:6]



4. 1차원적 사유와 거짓된 욕구


이러한 1차원적 사유는 대립의 통합과 전체주의적 언어 조작을 통해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로 하여금 일종의 최면술적 효과를 발휘한다. 이 결과 사회 구성원은 부자유를 자유로 느끼고, 행복의 범위를 물질적 풍요로 국한시키며, 자아상실적인 대중적 동화가 주는 안락함을 개성과 혼동한다. 이러한 억압적, 동질적, 전체주의적 최면 속에서 종종 개개인의 가슴을 후벼 파는 인간 내면의 진정한 욕구와 갈망들은 단지 일시적인 우울, 피곤함의 결과, 사회적 부적응의 증거로 치부된다. 인간 본연의 진정한 욕구는 체계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거짓된 욕구에 밀려 비정상의 위치로 떨어져버린다. 



“우리는 진실한 욕구와 거짓된 욕구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거짓된」 욕구란, 개인을 억합하는 것이 이익이 되는 특정의 사회적 세력이 개인에 대하여 부과하는 욕구를 말한다. 그것은 고역, 공격성, 궁핍한 상황 및 부정을 영속시키는 욕구들이다. 이 욕구를 채우는 일은 개인에게 있어서 대단히 즐거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행복이 사회 전체의 병폐를 인식하고 그 병폐를 개선할 기회를 포착한다는 [자타의] 능력의 발달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유지하고 보호해야 할 상태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경우에 발생하는 것은 불행의 한가운데 있는 병적 쾌감과 다를 바 없다. 광고에 나오는 대로 휴양을 취하고, 놀고, 행동하고, 소비하고 싶어 하고, 또한 남들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을 자기도 사랑하고 미워하고 싶다는 흔히 볼 수 있는 욕구들은 대개가 이 거짓된 욕구의 범주에 들어간다.”[각주:7]





  1.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이희원 역, 『일차원적 인간』, 육문사, (1993) [본문으로]
  2.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이희원 역, 『일차원적 인간』, 육문사, (1993), pp.24-25 [본문으로]
  3.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이희원 역, 『일차원적 인간』, 육문사, (1993), pp.121 [본문으로]
  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이희원 역, 『일차원적 인간』, 육문사, (1993), pp.112 [본문으로]
  5.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이희원 역, 『일차원적 인간』, 육문사, (1993), pp.113 [본문으로]
  6.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이희원 역, 『일차원적 인간』, 육문사, (1993), pp.116 [본문으로]
  7.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이희원 역, 『일차원적 인간』, 육문사, (1993), pp.2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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