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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학술

[도서 리뷰 정리]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 『죽음에 이르는 병』 / 범우사 -제1부-

by Radimin_ 2016.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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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1. 인간, 정신, 자기自己

2. 자기와 자기 자신의 분열 : 절망

3. 정신의 영원성

4. 절망 : 죽음에 이르는 병

5. 절망의 보편성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각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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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정리]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 『죽음에 이르는 병』 / 범우사 -제2부-



이 작품은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인간실존에 대한 탐구서이다. 제목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병의 원인과 실체, 그리고 이에 대한 처방을 내리고 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야기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육체적인 병이 아닌 정신적인 병이다. 그리고 그 병의 실체는 인간의 뿌리 깊은 ‘절망’이다. 



이 작품은 키에르케고르 특유의 변증법적 서술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그 때문에 작품 안에 등장하는 많은 내용들이 이항대립적으로 명확히 분류되지 않는다. 예컨대 그에 의하면 절망하는 것도 절망이지만 절망하지 않는 것도 절망이다. 또한 자기(自己)는 유한성과 무한성의 종합이다. 이러한 서술적 특징은 독자로 하여금 세심한 독서와 직관적 통찰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그 의미를 세심하게 곱씹지 않고 읽게 되면 독자는 변증법의 소용돌이 속에서 길을 잃게 될 것이다. 



필자도 이 책을 읽는 내내 상당한 고생을 했다. 하지만 일독을 한 이후 다시금 이 책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기존에 이해되지 않았던 작품의 내용이 조금은 명확하게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키에르케고르가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자기(自己)임을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피상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사실 인간은 자기로부터 분리되어있다. 자기 자신과 자기(自己)의 분열로 인해 인간은 절망한다. 인간이 스스로가 절망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인간은 절망상태에 빠져있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가 자기와 동떨어져있다는 점을 의식하든 못하든 인간은 자기로부터 분열되어있다는 점과 맞닿아있다. 



절망은 정신의 질병이며 정신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러나 육체의 질병이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과 달리, 절망이라고 하는 정신의 질병은 결코 정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끝나지 않는 죽음이고 영원히 죽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지속되는 질병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이러한 영원한 죽음, 영원한 절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처방을 기독교 신앙에서 찾는다. 이 점이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이 갖는 강점이자 약점이다. 그의 기독교적 처방이 강점인 이유는 절망하는 인간에게 모호하게나마 구원의 길을 지시해준다는 점에 있다. 또한 그것이 약점인 이유는 그의 심오하고 날카로운 인간 실존에 대한 통찰이 결국 인간이 발딛고 있는 지상 위에서의 완전한 실존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神)이라고 하는 신비적, 형이상학적 존재로 향하기 때문이다.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것은 바로 단독자(실존)가 신 앞에서 스스로의 실존을 완성한다는 의미가 되지만, 단독자는 ‘오직 신 앞에서만’ 자신의 실존을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이 점은 모든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힘에의 의지를 담지하고 있는 초인으로 거듭날 것을 주장한 니체와 대비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이제 이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인간, 정신, 자기自己


키에르케고르는 인간과 자기(自己)를 정의내리는 것으로 절망에 대한 통찰을 시작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정신이다. 그리고 정신은 자기(自己)이다. 자기는 종합이다. 종합은 양자 혹은 다자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기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가지는 관계이며 이 관계의 종합이다. 이러한 정의에 미루어볼 때, 종합과 통일을 이루지 못한 인간은 아직 자기(自己)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 즉 자기는 여러 관계의 종합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자기는 무한성과 유한성의 종합이며, 가능성과 필연성의 종합이다. 대립되는 양자가 하나의 종합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자기(自己)’는 변증법적 자기이다. 자기가 종합으로서 온전히 유지되면 인간은 비로소 자신과 자기의 종합을 이루게 된다.



2. 자기와 자기 자신의 분열 : 절망


그러나 종합은 언제나 분열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것은 정신에 내재된 제거할 수 없는 위험이다. 종합의 분열, 즉 자기와 자기 자신 간의 분열이 발생하면 인간은 자기와 동떨어지게 된다. 이 분열로 인해 인간은 절망한다. 



인간이 자기와 동떨어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자기에 대해서 욕구한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훌륭한 화가로서의 자기, 또 어떤 이는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자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구체적인 예를 말할 것도 없이 무엇보다도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자기가 되기를 욕망한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자기가 되기를 욕구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와 분리되어 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인간은 스스로가 바라는 자기가 아니기에 끊임없이 자기가 되고자 욕망한다. 이것이 바로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절망의 1형식ㅡ‘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구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인간이 자기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의 자기로부터 떨어져’ 다른 것으로 나아가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의 2형식ㅡ‘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구하지 않는 경우’이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기를 욕구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이기를 욕구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구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이기를 욕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절망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절망하고 또 절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변증법 속에서 자기는 하나의 종합이 되지 못하고 분열되어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은 인간의 영원한 절망이 된다. 



이렇듯 정신으로부터 절망이 발생하는 것은 정신이 영원성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은 물질적 현실세계의 물리법칙을 뛰어넘는다. 현실세계에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이 정신에 의해서 사유된다. 즉 정신은 순간성과 유한성을 뛰어넘어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에는 영원성이 깃들어있다. 이러한 정신의 영원성으로부터 절망이 발생한다. 인간이 만약 자기와의 종합에 도달하여 그 분열을 ‘끝낼 수 있다면’ 그는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절망을 끝낼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합은 언제나 분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설사 종합을 이룬다할지라도 분열의 위협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분열과 분열의 위협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곧 절망의 근원인 것이다. 



3. 정신의 영원성


정신에 영원성이 깃들어있다는 말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사후세계를 상정하지 않는 이상 육체의 죽음은 곧 정신의 소멸을 의미하는데, 정신이 영원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육체의 죽음에 따라 정신도 소멸한다는 점에서 정신 또한 유한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이의에 대해서는 먼저 키에르케고르가 기독교 신자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즉 그는 기독교적 신의 존재를 믿고 사후세계를 인정하기에 정신의 영원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신이 영원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말은 정신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즉, 정신의 존재가 영원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정신이 영원성을 사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차원에서 정신은 영원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에 입각한다 하더라도 키에르케고르의 영원한 절망에 대한 통찰은 퇴색되지 않는다. 



정신은 스스로가 존재하는 한에서 결코 멈추지 않는다. 즉 정신은 존재하는 순간에 ‘한해서’ 불멸함을 의미한다. 당신은 지금 존재하고 있다. 이 순간에 당신은 당신의 생각을 정지시킬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정신은 살아있는 한 죽지 않는다. 이 역설적인 명제에 키에르케고르의 변증법적 사유가 담겨있다. 이것이 바로 정신은 무한성과 유한성의 종합이라는 말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정신은 존재하는 순간에 한해서 영원함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 자기(自己)는 영원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 절망 : 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죽음은 끝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절망이 죽음보다 위험하게 느껴질 때 죽음을 원한다. 그는 죽음으로써 절망을 끝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신이 정신으로 지속되고 있는 이상 정신은 결코 죽을 수 없다. 만약 죽음으로써 절망이 끝나게 되면 그것은 곧 삶의 의지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절망상태에서 죽음이 희망이 되면, 그 희망이 마지막 남은 보루로서 삶의 의지를 추동한다. 죽음이라는 마지막 카드가 그를 살아남게 만든다. 즉, 죽음이라는 희망이 있는 이상 절망은 완전한 절망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신은 사유 속에서 스스로 죽을 수 없다. 따라서 절망은 죽음이라는 희망조차 없는 상태, 즉 끝나지 않는 영원한 죽음으로 향하는 병이다. 절망은 영원히 죽는 것이기에 없앨 수 없다. 정신은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죽고자 하지만, 죽을 수 없어 영원히 절망한다. 이것이 절망의 자승(自乘)법칙이다.



“이리하여 절망, 즉 자기 내부에 있어서의 이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절망자는 죽을 병에 걸려있다. 보통 인간이 병에 대하여 얘기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의미로서, 이 병은 인간의 가장 고상한 부분을 침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을 수가 없다. 거기서는 죽음이 병의 최후가 아니라 줄곧 계속되는 최후이다. 죽음에 의하여 이 병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병과 그의 괴로움은ㅡ그리고 죽음은, 죽을 수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각주:2]



인간은 흔히 ‘무엇인가에 대해서’ 절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다. 시험에 떨어져 절망하는 것은 불합격에 대한 절망인 것 같지만, 사실은 불합격한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다. 실연에 의한 절망도 사실은 실연상태에 빠진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며, 그 밖의 모든 절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다.



“자기에 대하여 절망하는 것, 즉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이 모든 절망의 공식이다.”[각주:3]



희망하고 있던 자기로부터 떨어져 나와 절망한 인간은 그 분열을 해소하기위해 자신이 바라는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는 것은 지금의 자기가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이고자 욕구하는 인간은 동시에 자기로부터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이고자 욕구하는 인간은 현재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자기 자신이고자 욕구하며, 더욱더 현재의 자기 자신이 되지 않고자 욕구하는 것이다. 현실세계의 물리법칙으로는 불가능한, N극으로 향하는 것이 동시에 S극을 향하는 것과 같은 절망의 변증법은 절망의 영원성을 나타낸다. 



5. 절망의 보편성


“절망은 아주 일반적인 것이다. 인간이 절망하고 있음은 희한한 일이 아니다. 정말로 그 희한한 것은 인간이 절망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만이 정말 희한한 일이다.”[각주:4]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절망은 보편적인 병이다. 오히려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매우 희귀한 일이다. 그가 이러한 진단을 내린 데에는 절망이라는 정신의 병이 육체적 병과는 질적으로 다른 변증법을 가지기 때문이다.



절망의 변증법은 건강과 질병의 이항대립으로 고찰되지 않는다. 이 변증법 안에서는 절망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망하지 않고 있는 것도 절망상태이다. 정신의 영역에 있어서 건강과 병은 모두 위기상태이다. 병이 위기인 것과 같이 건강 또한 정신의 위기이다. 행복상태에 있다고 해도 그 행복의 심연에는 불안과 절망이 자리 잡고 있다. 행복은 반드시 행복의 상실, 즉 무(無)에 대한 불안을 심층에 깔고 있다. 행복의 상실은 행복이 의식할 수밖에 없는, 행복이 언제나 직면하고 있는 위기이다. 이 위기는 가능성으로서 영원히 존재한다. 때문에 이 위기의 가능성을 없앨 수 없는 인간은 이 위기의 영원성에 대하여 절망한다. 



위기가 항존하는 이상 인간은 현재의 행복한 자기로부터 벗어나 이 위기가 존재하지 않는 더 행복한 자기가 되려고 욕구한다. 즉, 인간은 현재의 행복에 만족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행복이 지속되기를 바라며 지속되는 행복 속에 있는 자기를 또다시 욕구한다. 이 욕구는 앞서 고찰한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욕구’이자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욕구’인 것이다. 때문에 행복 속에도 절망은 영원히 존재한다. 따라서 절망은 아주 보편적인 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고 정신이고 또 정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지 않은 채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상태이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심하고 생활하며 인생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절망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절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깊은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정신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거나 괴로운 사건과 무서운 결단이 그들 자신을 정신으로 의식하도록 만든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그렇지만 실제로 절망하고 있지 않은 자는 매우 드물다.”[각주:5]



지금까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키에르케고르가 상정하는 인간과 자기(自己), 절망의 변증법과 절망의 보편성을 살펴보았다. 이후 그는 절망의 여러 형태들을 세분화하여 각각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분류한다. 


  • 유한성과 무한성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 가능성과 필연성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그리고 그 절망이 의식되었는지 혹은 무의식에 머물고 있는지에 따라


  • 의식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으로 나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이와 같은 절망의 형태들과 그 이후의 논의를 정리하여 소개하도록 하겠다. 



  1. 쇠렌 키에르케고르, 박환덕 역, 『죽음에 이르는 병』, 범우사, (1995) [본문으로]
  2. 쇠렌 키에르케고르, 박환덕 역, 『죽음에 이르는 병』, 범우사, (1995), pp.36 [본문으로]
  3. 쇠렌 키에르케고르, 박환덕 역, 『죽음에 이르는 병』, 범우사, (1995), pp.35 [본문으로]
  4. 쇠렌 키에르케고르, 박환덕 역, 『죽음에 이르는 병』, 범우사, (1995), pp.40 [본문으로]
  5. 쇠렌 키에르케고르, 박환덕 역, 『죽음에 이르는 병』, 범우사, (1995), pp.45-4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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