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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학술

[도서 리뷰 정리]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 『죽음에 이르는 병』 / 범우사 -제2부-

by Radimin_ 2016.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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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1. 유한성과 무한성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a. 무한성의 절망은 유한성의 결핍에 있다

  b. 유한성의 절망은 무한성의 결핍에 있다

2. 가능성과 필연성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a. 가능성의 절망은 필연성의 결핍에 있다

  b.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에 있다.

3. 의식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a. 절망을 알지 못하는 상태의 절망(무지의 절망)

  b. 절망을 자각한 상태의 절망

    b-1.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지 않는 절망(취약함의 절망)

    b-2.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는 절망(반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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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정리]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 『죽음에 이르는 병』 / 범우사 -제1부-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의 형태들을 구체화시켜 분류한다. 그에 의하면 절망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인 자기와의 분열에 의하여 발생한다. 자기는 종합이기에 절망은 곧 자기에 있어서의 종합의 분열이다. 



자기는 무한성과 유한성의 종합이다. 또한 자기가 자유임을 고려할 때, 자기는 가능성과 필연성의 종합이기도 하다. 즉 자기는 무한성/유한성, 가능성/필연성의 변증법에 의해 종합되고 구성된다. 따라서 종합의 분열 양상에 따라 절망은 다음과 같이 세분화될 수 있다.



  • 유한성과 무한성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  a. 무한성의 절망은 유한성의 결핍에 있다
  •  b. 유한성의 절망은 무한성의 결핍에 있다


  • 가능성과 필연성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  a. 가능성의 절망은 필연성의 결핍에 있다
  •  b.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에 있다



또한 절망은 그것이 인간에게 의식 되었는가 의식되지 못하였는가에 따라 구분된다.



  • 의식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  a. 절망을 알지 못하는 상태의 절망(무지의 절망)
  •  b. 절망을 자각한 상태의 절망



여기서 한 인간이 절망을 자각한 상태에 놓여있다면 이 상태에서 절망은 두 가지 형태로 세분화된다.



  • b. 절망을 자각한 상태의 절망
  •  b-1.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지 않는 절망(취약함의 절망)
  •  b-2.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는 절망(반항)



이러한 세분화에 따라 절망의 각 형태들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유한성과 무한성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종합을 통해 자기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인 자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인가가 된다는 것’은 곧 ‘구체화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체화는 유한한 것이 된다는 것도, 무한한 것이 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유한과 무한의 종합으로 향하는 구체화이다. 이러한 종합은 유한성과 무한성이 동시에 공존함을 뜻한다. 즉, 자기를 무한화 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과 동시에, 자기를 유한화 함으로써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종합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여 유한성과 무한성 중 어느 한 쪽이 결핍되면 인간은 자기가 되지 못하며 그는 절망상태에 놓이게 된다.



a. 무한성의 절망은 유한성의 결핍에 있다


유한성이 결핍되면 인간은 무한성의 절망에 빠진다. 한정되지 않은 채 무한성만을 간직하는 자기는 무한히 확대되어 공상적인 것이 된다. 공상은 자기 자신을 넘어 확대되는 것이기에 인간의 반성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자기 확대를 한정하는 유한성이 결핍되면 무한히 확대되는 공상에 의해 인간은 자기로부터 멀어져버린다. 이것은 곧 인간이 자기와 영원히 괴리됨을 의미하는 바, 무한성의 절망이 된다.



b. 유한성의 절망은 무한성의 결핍에 있다


무한성이 결핍되면 인간은 유한성의 절망에 빠진다. 이 경우 자기는 자기로부터 확대되거나 발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점차적으로 한정된다. 결국 인간은 완전히 유한적인 존재가 된다. 자기는 온전한 자기가 되지 못한 채 하나의 숫자가 된다. 그의 의미는 유한성의 규정에 따라 극도로 한정되고 수많은 인간 중의 하나, 세포로 구성된 유기체, 광활한 우주의 작은 먼지가 된다. 그는 수많은 탄생과 소멸의 과정 중에 놓인 하나의 점에 불과하며, 자기는 이 점 안으로 수렴한다. 그는 군중 속에 흡수되며, 군중으로서 정의될 뿐이다. 그의 존재가 군중을 구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하나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이것은 곧 인간의 자기가 소멸됨을 의미하는 바, 유한성의 절망이 된다. 



2. 가능성과 필연성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자기는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는 하나의 운동이자 자유로이 생성하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는 가능성이라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 운동과 생성이 가능하기 위해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이 점에서 자기는 필연성이라는 본질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즉 자기는 유한성과 무한성의 종합인 것과 마찬가지로, 가능성과 필연성의 종합이다.



a. 가능성의 절망은 필연성의 결핍에 있다


필연성이 결핍되면 인간은 가능성의 절망에 빠진다. 가능성은 자기가 무엇인가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다. 가능성은 인간이 갈망하는 자기가 될 수 있다는 필연성을 전제할 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가능성은 인간의 정신이 어느 방향으로든 나아갈 수 있다는 자유를 의미하지만, 이러한 자유가 무엇인가로 귀착되는 필연성으로 연결되지 못하면 그것은 구체화되지 못하는 추상적인 가능성이 되어버린다. 추상적인 가능성에 빠지면 인간은 그러한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시켜 종국에는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구체화되지 못한 전능함은 아무것도 되지 못하는 완전한 무능함으로 연결된다. 필연성이 결핍된 자기는 추상화된 가능성 안에서 공상적인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지쳐버린다. 



이러한 경우 가능성의 절망은 현실성을 결핍하게 된다. 비현실적인 가능성은 결코 현실화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공상 안에서의 가능성이며, 현실화되지 못한 채 영원한 가능성으로 남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현실성이란 필연성과 동의어가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가능성의 결핍 또한 현실성의 결핍을 가져온다. 현실성이란 가능성과 필연성의 종합으로 인해 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의 절망은 인간이 자기 안에 존재하는 필연성 즉, 자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앞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가능성에 있어서는 모두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가능성 안에서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길을 잃게 된다. 여기에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갈망하고 희구하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우울하고 공상적인 형태이다. (중략)

(여기서부터는 인용문에 대하여 약간의 수정을 가함) 희망을 갈망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잃은 자는 가능성을 추구한 나머지 한걸음 한걸음 자기 자신의 필연성을 돌이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되찾을 수 없게 된다. 우울의 경우에도 방향은 반대이나 같은 일이 일어난다. 여기서는 인간이 불안의 가능성에 유혹되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점차 멀어져 마침내는 불안 가운데서 멸망하거나 그가 불안해하던 것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각주:1]



b.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에 있다.


가능성이 결핍되면 인간은 필연성의 절망에 빠진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필연적인 파멸이다. 공포스러운 파멸이 필연적으로 정해져있고, 여기에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다면 인간은 절망한다. 가능성이 없는 세계에서는 모든 행동과 노력이 무의미하다. 행동과 노력은 인간의 자유이지만 가능성이 결핍된 그의 자유는 필연성의 흐름 앞에서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인간은 그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발버둥친다. 온몸이 불타고 있는 한 사람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은 그의 본능이 일말의 가능성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몸부림이 무의식적 본능이라 할지라도 그 본능에는 살아남고자 하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새겨져 있다. 이렇듯 육체 또한 죽음이라는 필연성과 삶이라는 가능성이 종합된 실체이다. 



그러나 정신의 경우 현실세계에 속한 육체의 생물학적 본능과 물리법칙으로부터 벗어나있다. 정신에는 육체와 같은 본능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정신에 있어서는 완전한 가능성의 결핍조차 가능하다. 따라서 정신은 가능성의 결핍으로 인한 필연성의 절망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정신에 있어서의 필연성의 절망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신이야말로 전지전능 즉, 무한한 가능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죽음과 소멸이라는 필연성에 갇혀있다 하더라도 무한한 가능성의 신 앞에 서게 되면 가공할만한 운명적 필연성이 무한한 가능성으로서의 신을 통해 변증법적 종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3. 의식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다른 차원에서 절망은 인간이 그것을 의식하는가 하지 못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고찰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절망이란 심리적인 감각이라고 이해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절망은 느껴지는 것이며, 절망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 자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절망은 단순한 절망‘감’이 아니다. 인간은 절망을 의식할 때 절망‘감’에 빠진다. 그러나 절망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절망은 의식되든 의식되지 않든 자기와 괴리된 인간 모두가 앓고 있는 본질적인 병이다. 



a. 절망을 알지 못하는 상태의 절망(무지의 절망)


이 경우 무지의 절망에 빠진 인간은 자신의 절망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러한 자들은 쾌와 불쾌의 감각 안에서 사는데, 그의 감각이 절망을 불쾌라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 절망 가운데 있다. 절망은 감각이 아니라 병이기 때문이다. 온 몸이 썩어감에도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듯이, 절망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불쾌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절망하지 않는 자라고 말할 수 없다. 육체의 병이 그 당장 그의 외모와 감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서서히 그의 육신을 잠식해나가듯, 절망이라는 정신의 병 또한 그의 정신을 은밀히 잠식해나간다. 이러한 절망이 그의 정신에 영원히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는다면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만약 한 순간이라도 그의 절망이 무지를 깨고 갑작스레 현현하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그는 절망에 잠식당한 자신의 정신을 바라보게 된다.



“정신 상실의 불안은, 바로 무정신적으로 안심하고 있는 모습에서 인정된다. 그런데도 그의 근저(根底)에는 불안이 있고 똑같이 절망이 있으며, 착각의 마력이 중지되고 현존재가 비틀거리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 근저에 있던 절망이 비로소 모습을 나타낸다.”[각주:2]



“자신이 절망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을 정신으로 의식하고 있는 상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있다. 그러나 자신을 정신으로 의식하고 있지 아니한 것, 그것이 바로 절망이고 정신 상실이며, 이 상태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이기도 하고 단지 무위도식의 생활이기도 하며 혹은 활력 있는 생활일 수도 있으나 어느 것이든 그의 비밀은 결국 절망인 것이다. 이 경우에서의 절망자는 폐결핵을 앓고 있는 자와 비슷하여 병이 가장 위험한 상태에 있을 바로 그때 그는 기분이 좋으며 도리어 건강하다고 생각해서 다분히 타인에게도 건강이 넘쳐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각주:3]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절망을 인식하지 않는 상태는 정신 상실의 상태이다. 정신 상실에 처한 인간은 신 앞에서 자신을 정신으로서 인격적으로 의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즉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자신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추상적인 보편(국가, 국민, 인류 등) 속에 밀어 넣어 용해시킨다. 



b. 절망을 자각한 상태의 절망


절망을 자각한 상태도ㅡ절망에 대한 무지가 절망인 것처럼ㅡ절망이다. 이 경우에는 그가 절망에 대하여 참된 자각을 하고 있는지가 문제시 된다. 



b-1.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지 않는 절망(취약함의 절망)



인간이 절망을 지각하여 자기 자신의 취약함을 느끼게 되면 이것이 곧 취약함의 절망이다. 이러한 절망에 빠진 인간은 취약한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한다. 즉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지 않는다. 



취약함의 절망에는 여러 정도가 있다. 이 중 순수한 직접성에 의거하여 지각된 절망은 가장 유아적인 절망의 지각 형태이다. 예컨대 재산을 잃는다든지, 외모가 추악하게 일그러져버렸다든지 하는 것으로부터 지각된 절망은 외부로부터의 수난으로 여겨지는 절망이다. 이러한 절망자는 외부와의 직접성에 의해 자신의 절망을 일종의 외부적 수난으로 바라본다. 이때의 자기란 외부와 관계되는 것에 한해서 자기를 규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절망에 빠진 자는 외부로부터의 수난을 보상하여 현재의 취약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 예컨대 재산을 잃은 자는 재산을 되찾음으로써, 외모에 문제가 생긴 자는 멋진 옷과 겉치장 등을 통해서 현재의 자기와는 다른 자기가 되고자 욕구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지각된 ‘자기’란 지극히 피상적인 ‘자기’이다. 외부의 수난에 의해 절망한 자는 사실 수난에 대하여 절망한 것이 아니다. 그는 ‘수난당한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한 것이다. 그의 절망은 수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단지 수난에 의해 촉발되었을 뿐, 절망이 머무는 곳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모든 절망이 자기에 대한 절망인 이상 그가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정한 자기를 꿰뚫어봐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놔둔 채 자기의 외부에 걸쳐진 옷을 갈아입어 다른 자기가 되고자 한다. 이는 마치 A라는 자가 자신의 옷을 벗어던지고 B라는 자와 똑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나는 더 이상 A가 아니라 B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절망을 불러들인 취약한 자기는 한 치의 변화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다. 그가 옷을 갈아입는다고 해서 절망이 그를 피해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옷을 갈아입음으로써 자신이 절망을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평생 동안 절망의 치유에 전혀 효과가 없는 헛된 몸부림만을 지속해나갈 뿐이다.



이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에 이른 절망의 지각 형태는 자기의 내면의 취약함을 인지한 절망이다. 이들은 순수한 직접성에 의거한 절망자보다는 한걸음 더 자기에게 다가가 있다. 그는 외부의 반성을 넘어서 내면의 반성을 통해 절망을 해소하고자 한다. 예컨대 지금의 자신보다 좀 더 인격적으로 성숙한 자기가 되기 위해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경우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도 결코 참된 자기를 의식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인간 실존에 대한 투명한 척도인 신 앞에 서기보다는 취약한 자기의 그림자와 대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인격적으로 성숙해져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는 거울 앞에 선다. 그러나 그 거울은 자기 자신을 비추고 있다. 여기에서 취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취약한 자신을 척도로 삼는 희극이 발생한다. 그의 노력을 배반하듯 절망은 그와 그 앞의 거울 사이에 그대로 머물러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에 대한 외부의 평가에 귀를 기울인다. 그를 향한 세간의 칭송으로 그는 자신이 취약함에서 벗어난 자기가 됐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보다 한층 더 불명료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림자는 자신의 거동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비추는 광원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가 없다고 말할 수 없고, 그림자가 크다고 해서 자기가 크다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림자가 어떤 형세를 띠든 자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으며, 절망은 멈춰선 자기와 그림자 사이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이보다 더 높은 수준에 이른 절망의 지각 형태가 있다. 그것은 자기의 외부와 내부가 아닌 영원한 것에 대한 절망을 지각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이러한 절망자는 그 어떤 절망자보다도 구원에 더욱 다가서 있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절망자라는 것은 그의 방향이 구원의 길에서 비껴서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신앙으로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한다. 이 경우에 있어 절망하는 자는 영원한 절망 앞에 서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증오한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절망자가 진정한 자기를 되찾고 절망에서 구제되는 것은 신앙에 의한 길밖에 없다. 따라서 신앙으로 들어가지 않은 자는 자기 자신을 획득하려고 욕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자는 마치 호흡이나 수면과 마찬가지로, 생명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고독을 욕구한다. 고독을 통해 그는 영원한 절망을 직시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신앙이라는 유일한 길이 결여되어있기 때문에 결코 절망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



“밀폐된 내부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밀폐된 인간의 내부를 다시 한 번 좀 더 들여다보자. 이 밀폐가 모든 점에 있어서 전적으로 완전하게 유지되는 경우에, 그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올 위험은 자살이 되리라. 물론 인간들은 대개의 경우, 그와 같은 밀폐된 인간의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만약 그것을 알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절대적으로 밀폐된 인간의 위험인 것이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만약 그가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단 한 사람에게라도 마음을 터놓는다면, 긴장이 풀리거나 의기소침해져서 밀폐된 결과로 인한 자살은 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밀폐라는 것은, 절대적인 밀폐보다도 한 음정만큼 부드러운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살하지 않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타인에게 마음을 터놓은 바로 그 순간에 마음을 터놓은 그것에 대하여 절망하고, 한 사람의 관지자를 갖는 것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편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와 같은 밀폐된 인간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얻음으로써 절망으로 빠져 들게 되는 실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 경우에도 역시 결과는 자살이 되는 것이다.“[각주:4]



b-2.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는 절망(반항)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욕구는 절망의 가장 높은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영원한 것에 대하여 절망한 자는, 취약한 자기에 대하여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이러한 절망은 최상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무한한 형태의 힘으로 산출된 자기’가 되고자 욕구하게 된다. 이것은 무한한 힘 앞에서 그것에 반항하여 자기 자신과 그 힘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는 동시에 다시금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욕구로 되돌아간다. 자기를 무한성과 완전히 일치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유한성의 결핍으로 인한 무한성의 절망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자신의 구체적 필연성을 부정하고 무한한 가능성에 다가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는 동시에 필연성이 결핍된 가능성의 절망이다. 높은 단계의 절망이 낮은 단계의 절망으로 되돌아가고, 구제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동시에 구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버리는 이러한 순환은 영원한 절망의 변증법을 나타내고 있다. 



절망자가 영원한 절망의 순환 속에 빠져드는 것은, 신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자신이 자기를 주시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에서 발생한다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자신이 자기를 주시한다는 것은 그가 자기와 괴리되어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자신을 주시하기 위해서는 자신과의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리는 인간이 자신과 종합을 이루지 못하고 분열되어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가 진정한 종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를 바라보는 보다 높은 차원의 척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최상위의 척도는 바로 그 자체로 영원하며 무한한 가능성의 완성자인 신(God)뿐이다. 신 앞에 선 단독자 만이 진정한 단독자로서 남아있을 수 있다. 단독자는 종합된 인간 실존이며, 이는 오직 신이라는 전지전능한 척도를 통해서만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쇠렌 키에르케고르, 박환덕 역, 『죽음에 이르는 병』, 범우사, (1995), pp.63 [본문으로]
  2. 쇠렌 키에르케고르, 박환덕 역, 『죽음에 이르는 병』, 범우사, (1995), pp.74 [본문으로]
  3. 쇠렌 키에르케고르, 박환덕 역, 『죽음에 이르는 병』, 범우사, (1995), pp.75-76 [본문으로]
  4. 쇠렌 키에르케고르, 박환덕 역, 『죽음에 이르는 병』, 범우사, (1995), pp.111-1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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