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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학술

[도서 리뷰 정리]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 문예출판사 -제1부-

by Radimin_ 2016.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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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1. 사랑은 기술인가?

2. 사랑에 대한 그릇된 관념

3. 사랑에 대한 갈구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 사랑, 인간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

4. 사랑의 본질 : 분리로부터의 합일

5. 사랑의 본질 : 생명을 나눠주는 활동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각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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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정리]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 문예출판사 -제3부-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을 뛰어넘을만한 궁극적인 문제가 있을까? 삶의 터전이 다르고 시대가 변해도 그가 인간인 이상 사랑만큼 그의 실존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가져도 사랑의 실패로 인해 절망의 밑바닥으로 추락하기도 하고, 삶의 가장 비참한 순간 속에서도 사랑을 통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그만큼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것이다. 



사랑이란 인간에게 이토록 중요한 것이지만, 사랑만큼 가벼이 취급되는 것도 드물다. 누구나 사랑을 이야기하고, 인간이 남겨온 수많은 글의 대부분은 사랑에 대한 글이며, 도처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들은 하나 같이 사랑을 노래한다. 사랑이란 말과 단어는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정작 진지하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낯부끄럽고 유치하고 나약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또한 사랑에 대한 약속은 얼마나 쉽게 남용되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들이 반년도 채 못가 남남이 되고, 그들 각자는 또다시 사랑의 부재로 괴로워한다. 사랑이란 불같은 감정이며 결코 이성으로 통제될 수 없는 것일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순간만큼은 그 누구나 자신의 사랑에 확신을 갖고 있었을 텐데, 어찌하여 이리도 쉽게 부서지고 잊혀지는가? 



정말 사랑이란 통제불가능한 한낱 감정인가?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나눌 ‘대상’을 찾아 헤맨다. 사랑‘한다’는 말과 사랑에 ‘빠졌다’는 말은 같은 것일까? 과연 사랑은 그 안에 빠지는 것인가? 사랑은 대상의 문제인가? 우리는 과연 사랑‘받지’ 못해 괴로운 것일까?



사랑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문제이지만, 정작 인간은 사랑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신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에 말려드는 것이 사랑의 본질일까? 그것은 어쩌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랑이라 착각된 격정 속으로 빨려들어가 그 흐름에 일방적으로 떠밀려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엔 자신의 의지가 없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정한 격정 속에서 그저 물살에 부딪치고 깊이 가라앉았다가 다시금 튕겨져 나올 뿐, 그 자신은 그 격정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고 수동적일 뿐이다. 



사랑이란 게 정말 ‘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어쩌면 단순한 ‘감정’이 아닌 ‘능력’이자 ‘기술’이 아닐까? 사랑이 단지 그 안에 빠지고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를 통해 성숙시켜나갈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사랑을 기술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변덕스럽고 알 수 없는 감정을 조금 더 현명하고 성숙하게 완성시켜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1. 사랑은 기술인가?


에리히 프롬의 저서 『사랑의 기술』은 이러한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사랑은 기술이라고 말한다. 사랑이 기술이라고? 어쩌면 많은 독자들은 사랑이 ‘기술’이라는 말에 일말의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기술이라는 말은 어딘가 인위적인 냄새를 풍긴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기술이라 칭한다는 건 사랑을 폄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술이란 말이 가지는 편견을 깨고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음미해보면 위와 같은 거부감 또한 불완전한 편견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술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담겨있는 능력이다. 인간은 의지를 통해 자신의 기술, 즉 능력을 행한다. 즉 기술이란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담아내어 완성시켜나가는 능력이다. 사랑이 기술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통해 사랑을 성숙한 단계로 완성시켜나갈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통제불가능한 감정으로서 인간의 능력 바깥에 있다면, 인간은 그 사랑에 관여할 수 없다. 이 경우 누군가에 대하여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해도, 그곳에는 의지가 없다. 이 때문에 인간은 사랑과 그 사랑의 붕괴에 대하여 일종의 면죄부를 획득한다. 자신의 사랑이 식은 것은 자의가 아니며, 사랑이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감정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언정 진정으로 성숙된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유아적이며 무력하고, 의지가 결여되고, 수동적이며 무책임한 사랑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의 감정에 대해선 무책임하고 무력하면서도, 자신이 사랑을 받는 문제에 대해선 상대가 자신을 변하지 않는 굳건한 의지로 사랑해주길 바란다. 문제는 상대 또한 사랑하려하기보단 사랑받는 것에 중점을 두는 이중적인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기술이 아닌 한낱 감정에 불과하다면 인간은 결코 사랑을 자신의 능력과 의지 안에 품을 수도 없고, 사랑할 능력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사랑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단지 사랑이라 여겨지는 일시적인 격정 속에서 오직 그 감정이 유지되기를, 그리고 그 감정이 꺼져갈 때쯤엔 상대가 다시 그 감정의 불을 지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기술이어야 한다. 자신의 의지가 담긴 사랑일 때 인간은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사랑이 기술이라면, 인간은 그 기술을 배우고 연마해야 한다. 이것은 한 인간이 사랑하는 능력을 갖춘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을 배워야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에리히 프롬은 그중 주요한 세 가지 이유를 든다. 



2. 사랑에 대한 그릇된 관념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아름다운 외모, 사회에서의 성공과 안정적인 지위, 관대하고 강인한 인품, 매력적이고 부드러운 성격 등 이 많은 것은 사람들이 ‘사랑받기’ 위해 평생을 신경써서 가꾸는 여러 요소들이다. 이것들은 사랑하는 능력이 아닌 ‘사랑받기 위한 꾸밈’이다. 자신의 매력을 가꾸면 훌륭한 상대가 자신을 사랑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사랑은 저절로 생겨날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서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흔히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능력이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적절한 대상만 나타난다면 사랑은 저절로 생겨날 것이라 생각한다. 사랑하는 것은 쉽고, 단지 그 대상을 찾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적절한 모델만 찾으면 저절로 훌륭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이러한 착각은 사랑의 대상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하는 경향과 관련이 깊다. 진열장에 진열된 상품을 고르듯,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할 사람의 매력을 가늠하고 선택한다. 그는 매력적인 상품을 구매하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자신을 가꾼다. 자신의 매력을 통해 매력적인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구매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이러한 끌림은 대상이 지닌 매력에 따라 좌우된다. 또한 이러한 끌림은 완전히 교환적이다. 따라서 비록 자신이 원하던 대상을 ‘소유’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대상의 매력이 더 이상 자신에게 매력적이지 못할 경우, 즉 질려버릴 경우 그의 끌림은 사그라들고 이는 사랑이 식었다는 말로 표현된다. 기존에 소유한 대상은 교환가치를 잃어 버려지고, 그는 또 다른 매력적인 대상을 물색한다. 그의 내면에 사랑의 능력이 없음은 자명하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에 대하여 사랑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상태’를 혼동한다. 사람들은 사랑의 감정이 촉발되는 ‘최초의 경험’을 잣대로 하여 그것이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끌림과 설렘, 그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는 강렬한 감정,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망설임과 묵직한 고통, 이런 것들이 그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격정은 사랑의 전부가 아니다. 누구나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영원한 사랑이란 지속되는 사랑을 뜻한다. 따라서 사랑은 최초의 경험과 더불어 지속되는 것을 아울러 포함한다. 그러나 최초는 최초인 이상 지속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지속된다면 최초의 경험은 최초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이며, 인간은 그 최초의 경험에 더 이상 최초라는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최초의 경험은 ‘가장 강렬한’ 격정의 순간이다. 최초의 경험만을 진정한 사랑이라 여기는 사람은 그러한 격정이 영원히 가슴 안에 솟아오르길 바란다. 그러나 인간은 자극에 대하여 무뎌질 수밖에 없다. 최초의 강렬한 격정이 동일한 형태로 다시 솟아오른다 해도 그는 그 격정에 더 이상 최초만큼 자극받지 못한다. 격정은 최초인 한에서 자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격정, 새로운 자극을 갈구한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은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신이 아니다. 그는 당신과 같이 유한하며 그인 채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람은 종국에 가서는 새로운 격정을 선사해줄 새로운 대상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애써 상대를 ‘사랑하려’하지 않는다. 의지를 가지고 그 사랑을 지속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그의 고통은 사랑을 유지하기위해 노력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저 새로운 격정 속에 빠지기를, ‘사랑에 빠지기’를 기다리다 지쳐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혼동 속에 빠진 사람의 결말은 뻔하다. 그는 다시금 자신의 무뎌진 감정에 좌절할 것이며 영원히 사랑을 하지 못한 채 자신이 빠져버린 찰나의 격정만을 쫒아 평생을 헤매게 된다.



“두 사람이 친숙해질수록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권태가 생겨나며 최초의 흥분의 잔재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그들은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각주:2]



이처럼 사랑은 단지 불가사의한 영역으로부터 자신을 찾아오는 격정이나 감정뿐인 것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인간의 의지가 담긴 사랑하는 능력, 즉 기술과 결부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랑이 기술인 이상 우리는 사랑하는 능력에 대하여 끊임없이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에리히 프롬은 본격적으로 ‘사랑의 기술’에 대하여 분석하고 서술한다. 그는 먼저 사랑을 인간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보고 이를 설명한다.



3. 사랑에 대한 갈구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 사랑, 인간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


인간은 왜 그토록 사랑을 갈구하는 것일까? 생명체가 단순히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목적에 따라서, 즉 생명유지본능에 따라서 사는 존재라면 어째서 사랑은 인간의 생존본능과 더불어 가장 본질적인 것이 되었는가?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자신의 생존에 불리한 조건 속으로 뛰어들게 만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생존마저도 포기하게 만들 만큼 인간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갈구는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사랑의 핵심은 분리의 극복이다. 인간은 자신의 실존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자신의 생존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쾌적한 환경 속에 살게 된다 해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고독이란 차벽을 꿰뚫어 맞잡을 손이 없다면 인간은 생존의 의미마저 잃어버린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존의 의미란 바로 고독의 극복이고 분리의 극복이며, 사랑하는 것이다. 



분리감과 고독의 공포는 인간의 삶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인간은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분리감을 해소하고자 처절하게 노력한다. 이러한 인간 실존의 분리를 극복하고자하는 노력들이 바로 인류가 쌓아온 역사이다. 인간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타인들과 교류한다. 하지만 표면적인 유대만으로는 인간은 실존적 분리를 극복할 수 없었다. 따라서 원시적 공동체에서는 도취적인 축제를 통해 의식적인 합일을 이루어 분리감을 극복해왔다. 그러나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인간에겐 점차 이러한 의식적인 합일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복잡한 법과 제도들은 무질서를 야기하는 도취적 합일을 금지시켰고, 인간은 점차 하나의 사회적 주체이자 개인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원자화되고 파편화되었으며, 각자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만 실존의 분리감은 그들의 고독을 부채질한다.  



과거 도취적인 합일의 축제는 이제 개개인의 도취적 노력으로 옮겨갔다. 알콜과 마약, 성적 도취에의 갈망과 중독, 자신의 건강마저 망쳐버리는 워커홀릭, 힘겨운 근로활동을 마치고 난 뒤에 의미 없이 흘려버리는 방전상태와 같은 휴식,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리감을 극복하기 위한 개개인 노력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분리감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일시적으로는 그들의 고독과 분리감을 잠재우지만, 다시금 깨어난 고독은 더욱 묵직한 기세로 인간의 내면을 짓누른다. 마치 개개인이 자신의 껍질을 두른 채 모여 있는 것과 같은 고독한 군중들은 사랑을 통해 자신의 껍질을 깨고 누군가와 진정으로 손잡고 껴안기를 소망한다. 사랑의 갈구는 고독한 개인들, 더 본질적으로는 고독한 실존들이 분리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절박한 희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4. 사랑의 본질 : 분리로부터의 합일


“대인간적(對人間的) 융합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갈망이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열정이고 인류를, 집단을, 가족을, 사회를 결합시키는 힘이다. 이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발광 또는 파괴ㅡ자기 파괴 또는 타인 파괴ㅡ가 일어난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성은 하루도 존재하지 못한다.”[각주:3]



그러나 이러한 대인간적 합일을 곧 진정한 사랑이라 명명할 수는 없다. 대인간적 합일 중에는 ‘공서적(공생적) 합일’과 같은 미숙한 사랑의 형태 또한 존재한다. 그것은 개인이 개인의 실존을 유지하면서 합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대상에게 흡수당하거나, 대상의 실존을 자신 안에 흡수하는 형태이다.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바로 이러한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능동적 형태들이다. 이들 각각은 자신 혹은 타인의 실존과 개성을 말살시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각각의 실존은 합일을 위한 도구로 기능하며, 이러한 합일 가운데 실존 자체가 유지되는 일은 없다.



공서적 합일과 대조되는 것으로는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 있다.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각주:4]



즉 진정 성숙한 사랑으로서의 합일이란 대상을 집어삼키거나 자신을 대상의 아가리 속에 밀어 넣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자신 그 자체, 대상이 대상 그 자체로 남아 있으면서 서로의 손을 맞잡는 것이다. 



5. 사랑의 본질 : 생명을 나눠주는 활동


성숙한 사랑은 받는 것에 앞서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받는다‘ 것에 앞서 ‘사랑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 사랑 받는다는 것은 사랑이 일종의 물질처럼 여겨짐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사랑은 활동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부터 오는 무엇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활동이다. 활동은 생명의 본질이기에 ‘사랑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하나의 생명임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물질은 쓰면 쓸수록 고갈된다. 그러나 활동은 많아질수록 더 강한 활기가 된다. 또한 활동은 외부로 발산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방향성’을 가진다. 따라서 사랑하는 활동은 곧 타인‘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준다는 것은 물질을 주는 것처럼 고갈로 이어지지 않는다. 사랑을 주면 줄수록,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은 하나의 활동으로서 강한 활기로 자라나며,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더욱 활기차게 하고 더불어 사랑의 손길이 닿는 대상의 생명도 고양시킨다. 



그러나 시장형 성격의 사람, 생산적 성격이 아닌 교환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받는 것 없이 주는 것을 곧 손해로 여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란 언제나 받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들에게 있어 주는 것은 고갈되는 것이며, 주지 않는 것은 유지하는 것이고, 받는 것은 축적하는 것이다. 이들에겐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러나저러나 그에게 있어 사랑은 물질과 같은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활동은 연료의 소비이며, 에너지의 소모이다. 그들의 성격은 언제나 정지를 지향한다. 유지, 축적, 쌓아두는 것, 이것이 그들에게 중요하며 그들의 사랑에선 활기를 느낄 수 없다. 당연히 그들을 둘러싼 고독의 차벽 또한 견고해져 간다.



“준다고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역에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ㅡ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顯示)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각주:5]



행위로서의 사랑, 즉 성숙한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고, 그에 대하여 책임을 지며, 그의 개성과 그가 그 자체임을 존중하고, 그에 대하여 알아가고 그에 대한 지식을 쌓는다. 



지금까지 사랑이 기술인지,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지, 사랑과 인간 실존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것인지를 에리히 프롬의 사유를 따라 정리해보았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 형태들이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특정 대상을 향한 이성적 사랑, 형제애, 신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다음 포스팅은 각각의 사랑에 대해 고찰한 에리히 프롬의 견해를 정리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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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06) [본문으로]
  2.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06), pp.17 [본문으로]
  3.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06), pp.35 [본문으로]
  4.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06), pp.38 [본문으로]
  5.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06), pp.42-4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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