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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학술

[도서 리뷰 정리]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 문예출판사 -제3부-

by Radimin_ 2016.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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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목 차 -

1.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1.1 어머니의 사랑 

  1.2 아버지의 사랑

2. 사랑의 대상

  2.1 형제애

  2.2 모성애

  2.3 성애性愛


- 제3부 목 차 -

2. 사랑의 대상

  2.4 자기애

  2.5 신神에 대한 사랑

3. 현대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4. 사랑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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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정리]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 문예출판사 -제1부-

[도서 리뷰 정리]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 문예출판사 -제2부-



2. 사랑의 대상


2.4 자기애


사랑의 형태를 검토하는데 있어 자기애도 빼놓을 수 없다. 자기애는 사랑의 대상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사랑의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자기애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는 경향이 다분하다. 사랑이란 타인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은 자기애를 사랑을 베풀지 않는 이기주의적인 것이라고 여기게끔 유도한다. 사랑이란 분명 생명의 활기를 베푸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될 이유는 없다. 



자기애가 부정적인 뉘앙스로 읽히는 이유는 사랑을 물질적인 관념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물질은 교환될 수 있으며, 물질을 타인에게 베풀게 되면 그것의 소유권은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옮겨간다. 반대로 베풀지 않으면 물질은 내 수중에 그대로 축적된다. 이러한 관념을 토대로 사랑에 대하여 접근하면 자기애는 곳 사랑을 베풀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축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자기애는 사랑에 대해 인색한 것,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물질적인 관념이 아니며 그 자체로 행위이자 생명 고유의 활기이다. 사랑은 행하면 행할수록 더더욱 생의 활기를 고양시킨다. 따라서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로인해 고양된 활기가 주변으로 넘쳐흐르며 사랑하는 자에게까지 되돌아온다. 사랑이 행위인 이상 타인을 사랑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은 생에 대한 긍정이며, 사랑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긍정하는 활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미 사랑의 능력이 결여된 자이다. 그의 생은 사랑을 통해 긍정되지 못하고, 이로써 타인의 생 또한 긍정하지 못한다. 사랑은 단지 하나의 대상에 국한되는 물질이 아니라 베푸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활동이다. 따라서 사랑은 사랑의 대상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는 자를 아울러 품는다. 따라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와 그의 사랑을 받는 자 간의 관계는 진정한 사랑의 관점에선 결코 성립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자기애와 이기주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기애와 이기주의는 동일한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기주의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진다. 그는 오로지 받기만을 원하며 자신이 이득을 획득할 상황이 아닌 이상 그 무엇도 타인에게 주려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기주의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기주의는 오히려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공허감과 절망감을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이다. 이기주의자는 사실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스스로에 대한 애착과 배려의 결여는 생의 활력을 좀먹고 그의 내면을 공허하게 만든다. 그는 이러한 공허감에 절망한다. 이러한 절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자기애의 결핍을 외적인 이득으로 보상받으려하지만 그의 결핍은 결코 채워지지 못한다. 그에게 결핍된 것은 베푸는 행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에게 베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도 사랑을 베풀지 못한다. 자신의 생명을 베푸는 행위, 즉 사랑의 결핍은 사랑 이외에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자기애와 이기주의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비이기주의는 어떨까? 비이기주의, 즉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타인에게 베풀기만 하는 행동양식 또한 진정한 사랑의 형태가 아니다. 비이기주의는 흔히 희생적 태도로 이해된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타인에게 베푼다는 의미에서 비이기주의는 칭송받아 마땅한 미덕으로 여겨진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타인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 일말의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애가 결부되지 못하고 불행을 수반하는 비이기주의는 결국 이기주의와 같이 자기 내면의 결핍을 외적인 것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행위에 가깝다. 이기주의자는 외적인 이익을 통해 애착의 결핍을 보상받으려 하는 반면, 비이기주의자는 내면의 합리화와 자기 처벌을 통해 위안을 얻고 결핍을 보상받으려 한다. 세간의 칭송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은 언제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 죄책감은 바로 자기애의 결핍으로부터 생성된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도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이 죄책감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 알 수 없는 죄책감에 떠밀려 자기 자신을 내팽개치고 타인에게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죄를 씻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 자신을 내팽개치는 것, 자신에 대한 애착의 결핍이 바로 그 죄책감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자기 처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애착이다. 그는 자신의 생을 긍정하고 스스로를 관대하게 보듬을 필요가 있다. 



에리히 프롬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말을 인용하여 자기애의 본질을 드러낸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각주:1]



2.5 신神에 대한 사랑


사랑의 대상이 인간을 넘어서 인간을 초월하는 신의 존재에까지 다다른다면, 그것은 바로 신에 대한 사랑이 된다. 신에 대한 사랑은 인간이 신을 사랑한다는 측면과 더불어 신이 사랑의 화신이라는 측면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신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인류에게 있어 가장 뜨겁고도 합의가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다. 이 글에서는 신이 존재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을 여기에서 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신의 개념은 인류의 역사와 언제나 함께 해왔으므로, 이 글에서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신과 사랑의 개념을 조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인류의 발전은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더 이상 단순한 자연의 일부분이 아니라 자연을 하나의 객체로 보기 시작하였다. 인간은 자신을 자연과 분리된 존재로 생각하게 되었다. 자연으로부터의 분리는 곧 인간 실존의 분리와 일맥상통하다. 사랑이 실존의 분리로부터 합일을 지향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행위라는 점에서 인간은 자연을 신으로서 숭배하고 사랑하며, 사랑을 갈구하기 시작하였다. 자연은 인간에게 외경의 ‘대상’이었다. 자연을 외경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은 곧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과 완전히 합일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자연의 특정 대상물에 투사하여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곧 인류의 원시신앙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신앙은 점차 추상화된 우상을 숭배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고, 나아가 신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신인동형(神人同形)의 신을 숭배하는 방향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 단계에서부터 인간은 신의 남성적 혹은 여성적 면모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한다. 더불어 신에 대한 사랑의 양상은 곧 인간의 사랑에 대한 성숙도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모계적 종교의 신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며, 있는 그대로 모두를 품안에 끌어안는다. 반면 부계적 종교의 신은 인간에게 믿음과 복종을 요구하며, 자신의 요구를 충족하는 자에게 보상하고, 이를 거역하는 자에 대해선 처벌한다. 이러한 두 가지 특성은 종교가 발달함에 따라 신의 개념 안에 동시 공존하게 된다. 즉 신은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을 동시에 구현하는 사랑의 화신이 된다.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신을 사랑하는 인간과 그 인간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사랑에 대한 성숙도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신에 대하여 어머니의 사랑만을 갈구하거나, 반대로 아버지의 사랑만을 갈구한다. 신에 대한 사랑을 통해 한 인간과 그가 속한 사회구조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다.



3. 현대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지금까지의 내용은 사랑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보이는 사랑의 양상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진단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전개될 내용은 우리가 실제 몸담고 있는 구체적 생활세계에서의 사랑의 양상들을 분석하는 것으로 방향을 옮겨간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사회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인간이 사회에 속해있는 이상 인간의 성격구조는 사회의 구조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분석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속한 현대 사회의 구조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 구조는 본질적으로 소외의 성격을 띤다.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부터 벗어나 상품이 된다. 인간은 상품 생산을 위한 노동력이 되며, 자본주의 사회 체계는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자신들이 개발한 각종 표준과 규칙 속에 노동력, 즉 인간을 밀어 넣는다. 자본주의 생산 체계는 생산의 효율성을 위해 상품 생산행위를 효율적 최소단위로 쪼갠다. 이에 따라 생산행위는 통합적 의미를 잃고 미시적인 반복 작업의 단계적 연쇄가 되며, 노동력은 이 각각의 작업단위 속에 배치된다. 개인은 개성을 잃고 반복 작업과 미시적 업무 속에 흡수되어 소모적인 기계의 톱니바퀴가 된다.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를 통해 체계를 확대 유지해나간다. 대량생산된 상품들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자본에 의해 운영되는 매스미디어는 대중들의 기호와 취향을 자본의 입맛에 따라 조작하여 대량생산된 상품을 소비하기에 적합한 표준화된 소비자로 만든다. 자본주의 소비 체계는 대량생산된 상품에 다양한 브랜드 상표와 약간의 디테일을 가미해 그것이 마치 진정한 개성의 표현인 것처럼 광고하고, 소비자 대중들은 개성을 구매한다. 



실존의 분리, 즉 인간의 소외상태는 자본주의 사회 체계의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인 생산조건이 된다. 군중들은 이러한 소외적 사회 구조 속에서 고독감을 느낀다. 그들은 모여 있으나 다 같이 소외되어있다. 현대인이 자신의 고독과 외로움을 고백하는 것은 곧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며, 괴로움은 숨겨야할 치부가 된다. 매스미디어를 위시한 소소한 오락거리들은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감을 완화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소외 그 자체는 그대로 유지된다. 자동인형의 성격 구조를 갖게 된 현대인들은 성숙한 사랑의 능력을 갖지 못한다.



이러한 현대 사회에서 결혼은 사랑의 결실인가? 이것은 모두의 희망사항이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굳이 강조하여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은 이 점을 알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의 결혼은 팀워크이다. 완만하고 원활한 관계만 유지한다면 그러한 결혼은 그럭저럭 성공한 것이 된다. 사랑이 있으면 정말 좋겠지만 팀워크만 원만히 유지된다면 굳이 없어도 문제될 것은 없다고 여겨진다. 사실 원만함 그 자체가 사랑으로 오인되는 경우도 많다. 부부간의 건강한 성생활은 사랑의 측면보다 결혼생활의 윤활제적 측면으로 강조된다. 성생활은 성숙한 사랑이 결여된 결혼생활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성생활에 문제가 생긴 부부들이 이혼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점은 이를 입증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생활의 실패가 사랑의 부재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사랑의 실패가 성생활의 부재를 낳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생활의 결여가 아니라 사랑하는 능력의 결여이다. 에리히 프롬은 성숙하지 못한 사랑이 가져오는 병리적 현상들을 여러 가지 구체적 사례와 예시를 들어 명확히 한다.



4. 사랑의 실천


기술에 대한 지식과 지식을 통한 현실진단 뒤엔 언제나 올바른 방향으로의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 법이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로 이론과 더불어 실천의 문제를 고려해야만 한다.



에리히 프롬은 독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명확한 ‘사랑의 실천법’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프롬 자신도 사랑의 실천에 대한 자신의 서술이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을 미리부터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사랑의 실천은 말 그대로 본인의 실천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랑에 구체적인 실천법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애초에 실천이 아닌 구체화된 이론에 불과하다.



따라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 기술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의 실천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원칙만을 제시할 뿐,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역할로 남겨두고 있다.



먼저 사랑이 기술인 이상 사랑에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는 성숙한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어 가장 기초가 되는 인식이다. 사랑을 단순히 격정과 감정으로 치부한다면 그는 결코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기위해 훈련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랑에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했다면, 기술의 훈련을 위해 ‘정신 집중’이 필요하다. 사랑이 인간의 실존 문제에 뿌리박고 있는 이상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정신 집중은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정신 집중이란 말은 현대 사회에 흔히 통용되고 있지만 진정으로 정신 집중을 행하는 현대인들은 드물다. 하루하루 복잡하고 까다로운 일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겐 육체적 회복과 불안 해소를 위한 방전상태와 같은 휴식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들여다보는 것을 게을리 한다면 결코 사랑의 기술을 훈련할 여건을 갖추지 못할 것이다. 그때그때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정신 집중을 통해 그 감정들을 고요히 관조하면서 그러한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원인들을 생각해본다면, 자신을 강박적으로 몰아세우던 감정과 성격 구조를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리히 프롬이 강조하는 원칙은 사랑에 대한 ‘최고의 관심’이다. 강박적이고 고통스러운 훈련이 아니라 차츰 새로워지고 즐거워지는 훈련이 되기 위하여 현대인은 사랑에 대하여 최고의 관심을 가져야 한다. 관심을 가지고 사랑에 대하여 고요히 사색하는 것을 즐긴다면 사랑의 기술을 훈련하는 데 있어 지치지 않는 원동력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이 사랑의 기술을 훈련하는 데 있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이다. 여기에 덧붙여 프롬은 중요한 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즉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이다. 반면 외부 세계의 현상은 그 자체로서는 현실성이 없고 오직 이러한 현상이 자아도취적 인간에게 유익한가 위험한가에 따라 경험된다.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각주:2]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 객관적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내가 객관성을 잃고 있는 상황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나는 자아도취적으로 왜곡된 어떤 사람과 그의 행동에 대한 ‘나의’ 상과, 나의 흥미, 욕구, 공포와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나의 현실 사이의 차이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각주:3]



더불어 프롬은 신앙을 강조한다. 여기서의 신앙은 종교적 신앙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확실성과 실존에 대한 신앙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의 조건이고, 니체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에 의해 규정될 수 있으므로, 신앙은 인간 실존의 한 조건이다. 사랑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 곧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능력과 그 신뢰성에 대한 신앙이다.”[각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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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06), pp.88-89 재인용 Meister Eckhart [본문으로]
  2.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06), pp.160 [본문으로]
  3.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06), pp.162-163 [본문으로]
  4.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06), pp.16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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