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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학술

[도서 리뷰 정리] 플라톤Plato / 『국가The Republic』 / 삼성출판사 -제1부-

by Radimin_ 2016.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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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 목 차 -

1. 정의에 관한 고찰

  1.1 폴레마르코스의 정의에 관한 주장과 소크라테스의 반박

  1.2 트라시마코스의 정의에 관한 주장과 소크라테스의 반박

    a. 첫 번째 모순

    b. 두 번째 모순

    c. 세 번째 모순

    d. 부정은 정의보다 지혜로운가?

    e. 부정은 정의보다 유능하고 강한가?

    f. 부정은 정의보다 이로운가?



    

플라톤(기원전 428/427 또는 424/423 – 기원전 348/347)의 『국가The Republic』[각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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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서양의 학문과 문화, 사고체계의 커다란 원류를 이루는 철학자이다. 『국가』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덕과 정의, 국가체계, 그 밖의 굵직굵직한 사상체계를 개진한 불후의 고전이다. 요컨대 이 책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는 ‘정의’와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서양의 문화와 사고체계를 받아들여 발전시켜온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할 고전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지금으로부터 약 2천 4백 년 전에 쓰인 책이지만, 그 안엔 여전히 우리가 배우고 사색해야할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도 전혀 퇴색되지 않는 고전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정리하는 것에 대하여 굉장한 부담을 느낀다. 필자의 능력이 부족한 관계로 지극히 얕은 수준에서 내용을 파악하는 것에 그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포스팅은 그저 배워가는 일개 독자의 공부과정 정도로 받아들이길 권하며, 좀 더 심오한 이해를 원하는 분들은 직접 이 책과 이 책에 대한 여러 훌륭한 해설서를 정독하길 권하는 바이다.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 중 하나인 『국가』는 플라톤이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명시적인 대화의 주체는 그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이다. 따라서 이 책에 담긴 내용을 정리할 때 서술의 주체는 불가피하게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두 인물을 혼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정의(正義)에 대한 논의에 대하여’라든가 혹은 ‘플라톤은 이데아론에 대하여’라는 방식으로 정리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사유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과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사상을 개진하는 부분도 있음을 아울러 고려해야하기 때문인데, 이 점에 있어서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흐름은 크게 다음과 같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 글라우콘과의 ‘정의’에 관한 토론을 통해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한다.



그 다음 ‘정의’가 무엇인지에 관해 더욱 면밀히 고찰하기 위해서 정의로운 국가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국가에 속한 정의로운 개인은 어떤 모습일지 밝힌다. 이는 커다란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여 점차 개인에게 수렴해가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국가의 다섯 가지 정체(政體)에 관한 고찰을 통해 가장 정의로운 정체와 가장 불의한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나간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이 책의 백미로 꼽고 싶다. 



1. 정의에 관한 고찰


인간과 사회, 정치에 관한 가장 원론적인 주제를 하나 꼽자면 그것은 다름 아닌 정의(正義)가 아닐까? 정의의 문제는 인간이 사회를 이뤄낸 그 순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탐구되어온 중요한 화두이다. 정의(正義)를 어떻게 정의(定義)내리느냐에 따라 사회의 구조와 법률체계, 정책, 그 사회에 속하는 개인의 삶, 나아가 국가의 운명까지 결정되곤 했다. 그만큼 정의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 핵심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무엇이라 생각했을까? 이 문제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필자가 읽은 판의 기준으로 4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전체가 사실 정의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정의(定義)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의에 관한 정의를 내리기에 앞서 정의에 대한 여러 견해들에 대해 논박하는 형식으로 정의에 관한 논의의 큰 틀을 마련한다. 



1.1 폴레마르코스의 정의에 관한 주장과 소크라테스의 반박 


이 책의 초반부에서 여러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의 명성을 듣고 그에게서 의견을 듣고 토론하기 위해 몰려온다. 그 중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정의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국가』의 막이 오른다.



폴레마르코스는 정의에 대하여 ‘의로움이란 빌린 것을 갚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갚는다는 것은 빌린 것과 알맞은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의로움에 대해서는 의로움을 빚지고 있으며 의로움이 알맞으므로 의로움을 갚아야하며, 악에 대해서는 악을 빚지고 악이 알맞으므로 악을 되갚아야한다는 것이다. 즉, 친구에게는 의로움을, 적에게는 악을 되갚는 것이 정의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의견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여러 질문을 던지면서 점차 그 의견의 모순을 논파해나간다.



소크라테스는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존재와 인간 사회에 통용되는 기술들이 정의와 동일한 원리 하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입장에 입각하여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에게 질문을 던진다.



가령 ‘의술은 어떤 사람을 의술과 동떨어지게 할 수 있는가?’ 또는, ‘말(馬)이 말에 대하여 말이 아니도록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두 질문에 옳은 답은 모두 ‘아니오’가 된다. 의술의 본래 목적은 인간 신체의 균형과 건강이기에 결코 사람을 의술에서 멀어지게 할 수 없다. 또한 말(馬)은 말이 말 그 자체라는 것을 의미할 뿐 결코 말을 말이 아니게 할 수 없다. 따라서 대답은 모두 ‘아니오’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에 관해서는 어떨까? ‘정의가 정의에 대해서 정의롭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정의는 다른 것들과 동일한 원리 하에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전제에 따르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당연히 ‘아니오’가 된다. 그렇다면 각각의 본성에 따라 의로운 것은 더욱 의롭게 하고, 악한 것은 더욱 악하게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악을 당하면 더욱 악해진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결론을 토대로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을 뒤집어 ‘빌린 것을 갚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친구에 대해선 의로움을 갚음으로써 친구를 더욱 의롭게 하지만, 적에 대해서는 해롭게 함으로써 더욱 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의로움은 결코 대상을 악하게 만들지 않으므로 빌리는 것을 갚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며, 누구에게든 해롭게 하는 것은 의로움이 아니다. 



1.2 트라시마코스의 정의에 관한 주장과 소크라테스의 반박


폴레마르코스와 소크라테스의 토론이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자 누군가 분개하여 뛰쳐나와 소크라테스에게 도전한다. 이 자가 바로 트라시마코스이다. 트라시마코스는 노골적으로 소크라테스를 조롱하면서 소크라테스의 논증은 한낱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응수한다. 이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를 은근히 자극하여 그는 정의에 관하여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주장하도록 만든다.



이에 말려든 트라시마코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는 ‘정의란 강한 쪽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약자는 강자의 이익에 봉사하고 강자는 자신의 이익을 철저히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란 의로움이기 이전에 이로운 것이고 강자야말로 이익을 추구할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강자가 자신의 이익을 약자에게 관철하면 그것이 곧 의로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a. 첫 번째 모순


이러한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첫 번째 응수는 참으로 재치가 넘친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에게 강자도 또한 인간이므로 종종 잘못을 범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트라시마코스는 이를 인정한다. 이를 토대로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담긴 첫 번째 모순을 파헤친다.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라면, 강자에게 이로운 행동은 옳은 행동이고 강자에게 해로운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다. 트라시마코스가 인정한대로 강자가 종종 잘못을 범한다면 그것은 강자가 종종 자신에게 해로운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한편 약자는 강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의로운 것이다. 그렇다면 강자가 잘못하여 자신에게 해로운 일을 약자에게 명령한다면 약자는 강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의로운 것이므로 강자에게 해로운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강자에게 이로운 것도 정의이지만, 강자에게 해로운 것도 정의가 된다. 



소크라테스의 응수에 몰린 트라시마코스는 또 다른 주장을 펼친다. 강자는 분명 잘못을 저지르긴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잘못을 저지른 강자는 이미 강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강자가 잘못을 저지른다는 말은 언어의 특성으로 인해 그자를 강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가피한 표현일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잘못을 저지른 그 순간 그는 강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므로 강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잘못을 저질러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의사에 대하여 그 순간 그를 의사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실질적 의미에서 강자란 언제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는 자이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순간에만 강자이다. 자신의 이익을 쫓는 그 자체가 강자의 특성이기에 말의 제약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강자’가 잘못을 저지르는 순간에 약자가 이에 복종하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강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의롭지 않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도 ‘실질적인’ 차원을 파고들며 응수한다.



b. 두 번째 모순


앞서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다른 모든 것과 동일한 원리 하에 속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전제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번에도 기술이 가진 본성을 논하고 이를 정의의 문제로 옮겨간다. 



기술이란 그 기술의 대상이 되는 것을 지배하여 이롭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의술은 인간의 신체를 지배하에 놓고 그것을 이롭게 하는 기술이다. 더불어 선장은 엄밀한 의미에서 선원이라기보다는 선원을 지배하는 자이다. 그리고 선장의 본질은 항해에 있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항해 중에 선원의 올바른 역할을 지시하고 그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기술과 지식은 자신의 본성과 덕에 따를 때 의로운 것이다. 이에 대해서 트라시마코스는 마지못해 동의한다.



그렇다면 의술의 덕과 정의는 의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배하는’ 신체를 이롭게 하는 것이며, 선장의 덕과 정의는 선장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지배하는’ 항해와 선원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지배를 행하는 사람이든 그의 정의는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지배받는 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따라서 강자가 약자에 대한 지배자라면 강자는 자신이 이익이 아니라 약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의로운 것이 된다. 



c. 세 번째 모순


이렇게 되자 트라시마코스의 정의(正義)에 관한 정의(定義)는 거꾸로 뒤집혀버리고 만다. 이에 대하여 트라시마코스는 의로움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킨다.



트라시마코스는 당초 정의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바꾸지는 않는다. 즉 그에게 있어 정의란 여전히 강자의 이익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강자’의 이익일 뿐이며, 피지배자에게 정의는 스스로 받는 손해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정의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기에 피지배자의 남인 지배자를 이롭게 하는 이상 피지배자들에게 의로움은 손해이기 때문이며, 실제적으로도 의롭게 행동하는 피지배자들은 강자의 이익에 봉사하며 손해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지배자에게 이익이란 ‘부정’이다. 이들이 의로우면 의로울수록 그들은 손해를 보지만 그들이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그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더욱 많이 획득한다. 



이러한 주장은 당초 소크라테스가 정의는 이로운 것이며, 정의의 본질은 타인을 의롭게,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라 생각된다. 



이것에 대하여 먼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세 번째 응수가 이어진다.



기술이란 기술 그 자체만으로 봤을 땐 분명히 기술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기술을 가진 자는 기술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이익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기술을 행함으로써 보수를 받는다. 만약 항해술을 통해서 바다의 특유한 환경에 의해 항해자가 건강을 획득한다면 항해술을 의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보수를 받는 것도 다른 기술과 구별되는 하나의 기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양치는 기술은 양을 이롭게 하여 살찌우지만 여기에 보수를 받는 기술이 덧붙여져 양치기는 보수를 얻는다. 다른 기술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보수를 받는 기술이 덧붙여져 기술자가 자신의 이익을 획득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보수를 받는 이익은 다른 기술이 아닌 보수를 받는 기술에서만 생기는 것이 된다. 따라서 지배자는 아까 논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자신의 이익이 아닌 피지배자의 이익을 위해서 좋은 일을 실행하고 명령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수를 받는 기술을 덧붙여 지배자로서의 보수를 요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지배하기를 승낙하는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명예와 보수를 주어야하고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처벌을 주어야 한다.



지배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에게 처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훌륭한 사람은 지배를 통해 보수를 얻는 자로 불리길 원치 않기 때문이고, 명예욕은 더더욱 없기 때문에 결코 지배자가 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지배할 것을 처벌로서 강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처벌에는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소크라테스는 덕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벌은 다음과 같다고 말한다. 



“만약 자기 자신이 지배할 생각이 없다면, 자기만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각주:2]



따라서 정의로운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있다면 그들은 자기가 지배하기 보다는 지배받음으로써 남이 자기를 이롭게 해주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 결코 될 수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주장한다. 



d. 부정은 정의보다 지혜로운가?


소크라테스의 세 번의 응수를 통해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논파당했다. 하지만 정의에 관한 다른 문제가 대두된다.



트라시마코스는 부정이 정의보다 이롭다고 주장한다. 부정한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과 달리 언제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고자 하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보다 언제나 더 큰 이득을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로움이란 고귀하고 천진스런 인품은 될 수 있으나 결코 지혜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부정한 사람보다 언제나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반면 부정한 사람은 자신의 이득을 우선한다는 점에서 사리에 밝고 분별력 있는 자이므로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트라시마코스의 말처럼 부정은 의로움보다 지혜로운 것인가? 이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나간다.



의로운 사람은 고귀하고 천진스런 인품의 소유자이므로 악하고 부정한 사람을 능가하고자 할지언정 결코 자신과 같은 의로운 사람을 능가하여 뛰어넘으려고 하지 않는다. 반면 부정한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은 물론이고 자신과 같은 부정한 사람조차 뛰어넘으려 한다. 



이와 동일하게 유식함에 대하여 고찰해보면, 유식한 자는 무식한 자를 능가하고자 하지만 자신과 같은 유식한 자를 능가하려고 하진 않고 다만 그 사람처럼 행동하기를 원한다. 무식과 유식의 경계는 있을지언정 유식한 자들 사이에선 정도와 방향의 차이만 있을 뿐 유식하다는 것은 같기에 유식한 자가 유식한 자를 뛰어넘는 것은 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반면 무식한 자는 무식한 자와 유식한 자를 모두 뛰어넘으려 한다. 그러한 행동 자체가 무식함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식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덕이 있고 선량한 사람이다. 앞서 의로운 사람은 자신과 같은 사람은 능가하려 하지 않지만, 부정한 사람은 자신과 같은 사람까지 능가하려 한다는 점에 합의했다. 두 사람이 서로 닮았다면, 그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성질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고 덕이 있고 선량한 사람이며, 부정한 사람은 무식하고 악한 사람임이 드러난다. 이를 통해 트라시마코스의 ‘부정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주장은 논파당한다.



e. 부정은 정의보다 유능하고 강한가?


이로써 부정은 정의보다 지혜롭지 못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와 더불어 부정이 정의보다 유능하고 강한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부정이 정의보다 이롭다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곧 부정이 정의보다 이익에 대해 유능하고 강하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나라의 차원에서 유능하고 강한 나라는 다른 나라들을 예속시키고 지배한다. 그렇다면 이렇듯 부강한 나라에서 정의의 역할은 없는 것인가? 부정이 과연 그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가? 



만약 어떤 부정한 나라들이 존재하여 이들이 다른 나르들을 부정하게 종속시키고 지배하고 있다면 그들은 트라시마코스의 관점에선 가장 훌륭하고 가장 완전하게 부정한 나라가 된다. 부정은 강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나라들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려면 가장 완전하게 부정한 나라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완전한 부정에 대하여 살펴보자. 만약 부정을 추구하는 집단들끼리 서로에게 부정한 것을 행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협동하지 못하고 서로를 증오하게 된다. 부정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불화와 분열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에 대해서만큼은 부정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서로에 대한 신의를 가지고 협동하여 더욱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강력한 집단적 힘이 부정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집단적 힘은 협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한 협동은 정의라는 기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부강한 나라는 적어도 완전한 부정에 의해 부강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의로움을 통해 이룩된 집단적 힘이 부정한 목적을 추구한 것에서 그들은 반편이가 된 것일 뿐이다. 부정한 목적을 통해 부정을 저질렀을지언정 그 나라의 힘이 의로움에서 기인한 것인 이상 적어도 부정이 강함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참이 될 수 없다. 



f. 부정은 정의보다 이로운가?


이를 통해 부정은 지혜롭지도, 강하지도 않은 것임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트라시마코스의 견해 중에서 단 한 가지의 문제만이 남게 된다. 과연 부정은 정의보다 이로운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이를 논박한다.



모든 사물과 기술은 각기 고유의 덕을 갖고 있다. 덕이란 각 사물이 제구실을 훌륭한 수행함에 있어서 필요한 요소이자 탁월성이다. 따라서 어떤 사물이 제구실을 충실히 해낸다면 그 사물은 자신의 덕에 충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덕의 이치는 사물 이외에 모든 것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영혼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영혼도 제구실에 따르는 덕을 가지고 있다. 영혼의 구실이란 마음을 쓰는 것, 지배하는 것, 충고하는 것 등의 모든 행위이다. 만약 영혼이 덕을 상실한다면 영혼은 제구실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앞서 정의가 덕이고 부정이 악이라는 점에서 합의를 보았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은 덕을 가지고 있기에 덕을 지니지 못한 부정한 사람보다 모든 일에 대해서 더욱 잘하는 사람이 된다. 자신의 구실과 뜻에 따라 잘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따라서 의로운 사람은 행복하고 부정한 사람은 불행하다. 행복하다는 것은 이로운 것이며, 불행하다는 것은 이로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부정은 결코 정의보다 이롭지 못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트라시마코스의 모든 견해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정의에 관한 논의는 이 책의 서막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와 트라시마코스의 정의(正義)에 관한 정의(定義)를 논박하면서 정의의 성질에 대해서 다루었을 뿐, 그 스스로 정의에 관한 정의를 내리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글라우콘의 정의에 관한 질문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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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플라톤, 조우현 역, 『국가』, 삼성출판사, (1990) [본문으로]
  2. 플라톤, 조우현 역, 『국가』, 삼성출판사, (1990), pp.5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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