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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학술

[도서 리뷰 정리] 장 자크 루소J.J. Rousseau / 『에밀Emile』 / 청목

by Radimin_ 2016.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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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1. 루소의 교육철학 개론

2. 루소의 교육론 비판

  2.1 루소의 자연성은 진정한 자연성인가

  2.2 루소의 교육론에 내재된 성적편향성

  2.3 루소의 교육론은 진정 인간성 해방의 교육인가

3. 마치며




장 자크 루소(J.J. Rousseau, 1712~1778)의 『에밀』[각주:1]



이 책은 장 자크 루소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교육이 무엇인지 서술한 교육철학서이다. 약 300년 전에 저술된 이 교육철학서는 시대적 간극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현대인이 생각하는 교육과는 다소 동떨어진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에 담긴 루소의 교육에 대한 성찰은 교육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에 앞서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기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깊다. 



이 책의 제목인 ‘에밀’은 루소가 만들어낸 허구적 인물로서 자신의 교육철학에 따라 교육받고 성장하는 인물이다. 루소는 인간이 진정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이 무엇인지를 에밀의 성장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이 허구적 이야기 속에서 루소는 에밀의 평생교육자로서 자신의 교육철학을 통해 에밀을 진정한 인간으로 교육시키고자 한다. 



1. 루소의 교육철학 개론


루소는 자신의 논의의 기초 전제로서 교육을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교육은 자연이나 인간에 의해서, 또는 사물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다. 우리의 능력과 기관(器官)의 내부적인 발육은 자연의 교육이다. 이 발육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인간의 교육이다. 우리들을 자극하는 갖가지 사물에 관해서 우리들 스스로 경험에 의해 얻는 것은 사물의 교육이다.”[각주:2]



루소는 이 세 가지 교육이 조화를 이루고 궁극적으로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하여 합쳐질 경우에만 아이는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세 가지 교육은 조화를 이루어야하지만 인간의 교육과 사물의 교육은 궁극적으로 자연의 교육에 이끌려야 한다는 것이 루소 교육론의 핵심이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본래의 심적 상태가 존재한다. 이 본래적 상태는 가만히 두면 자연이 이끄는 방향으로 자연스레 나아간다. 이를 루소는 자연성이라 부르며 가장 이상적인 성장의 형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부득이하게 사회를 이룰 수밖에 없다. 사회를 이루면서 형성된 언어와 사회적 제도, 관습은 인간의 감각을 뒤틀고 편견을 조장한다. 이는 인간의 자연성을 왜곡시키고 자연과 인간 사이에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때문에 우리는 교육을 통해 이러한 편견과 왜곡을 교정하고 문명 속에 살면서도 자연성에 합치되는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다. 



이른바 자연인의 육성이 루소가 말하는 인간 교육의 핵심이다.



실제로 우리는 어린이에 대해서 그들의 본래적 자연성을 무시한 채 어른의 시선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어린이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지니고 있는 그릇된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논의를 진행시켜 간다면 앞으로 나아갈수록 우리들은 더 그릇된 방향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가장 현명한 사람들조차도 어른들이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일에만 전념하는 나머지 어린이들이 현재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다. 그들은 한결 같이 어린이 속에서 어른을 찾고 있으며, 어린이가 어른이 되기 이전에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각주:3]



따라서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를 교육시키기에 앞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어린이들의 본성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린이의 성장 과정에서 이를 지켜보는 어른들의 희망과 불안, 독선, 편견들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철저히 어린이의 관점에서 자연이 어린이에게 심어놓은 자연적 본성에 따라 어린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교정해주는 것만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다. 특정한 직업, 특정한 사회적 지위, 특정한 능력을 학습시키기에 앞서 자연성에 부합하는 강직한 인간, 스스로 생존하고 스스로 적응하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을 완성시키는 것이 교육의 진정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린이에 대한 지나친 보호나 지나친 방종은 피해야 한다. 지나친 보호는 어린이의 적응능력을 저하시키고 두려움을 심어주어 의존적인 성향을 강화하기 때문이고, 지나친 방종은 사랑과 관심의 결핍으로 그의 성격 자체를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루소에 따르면 어린이를 언제나 사랑으로 보살피되 그들이 지닌 능력 안에서 설정한 목표를 최대한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루소의 교육에는 사변적인 철학이나 형식적 교리, 이론에 치중한 과학교육은 매우 부차적인 수준에 머문다. 그러한 교육들은 어린이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 진정한 지식을 기반으로 할 때 쓸모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이는 사변적, 이론적 교육에 앞서 스스로 탐구하고 느끼고 경험하는 교육을 통해 세상을 배워나가야 한다. 



또한 어린이의 욕망을 키워나가기에 앞서 그들이 직면한 필연성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이해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루소는 주장한다. 즉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현실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 사물은 세계에 존재하는 자연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과 같은 필연성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적정 수준의 욕망이 자리 잡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무한한 욕망에 의한 정신적 고통을 방지하고 진정한 행복을 구가하는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연성을 어린이가 이해하기 위해서 그는 다양한 경험을 스스로 해나가야 하며, 그가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고통이라면 어른은 어린이에게서 그 고통을 제거할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가르쳐야 한다.



루소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바람직한 교육과 성장과정을 에밀이란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그의 교육론은 이 책이 출간될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기에 극단적인 찬반양론을 형성하며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에밀』은 금서로 지정되고 루소는 수배되어 도피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는 그의 자연인 교육철학이 그 당시 사회질서에 얼마나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그는 종교 자체를 교육의 필수항목으로 구분했으나 종교 교리의 경직된 형식주의와 허례허식을 배척함으로써 종교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자연성에 입각한 교육을 중시함으로써 문명과 제도화된 교육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이 점이 지배계층의 심기를 상당히 건드린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보면 루소는 자신의 교육사상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으로 임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은 교육에 대한 보편적 철학을 확립하고자 했던 그의 의중에 신뢰성을 더해준다. 



하지만 이렇듯 시대적, 문명적 편견을 경계한 루소조차도 자신이 만들어낸 편견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 같다.  



2. 루소의 교육론 비판


2.1 루소의 자연성은 진정한 자연성인가


먼저 루소는 자신의 교육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연과 자연성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자연성이 진정 객관적인 자연성인가는 따져볼 문제이다. 그 자신이 그가 말하는 진정한 자연인이라면 언어와 관념 이전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눈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루소도 문명사회에서 양육된 인간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루소를 진정 자연인이라 확신할 수 있는가? 어쩌면 그가 바라보고 확신하고 있는 ‘자연 그 자체’엔 알게 모르게 그의 편견이 개입된 결과물일 수도 있지 않은가? 편견이란 결코 그 자신이 깨고 나오기 전에는 편견으로 인지될 수 없다. 이 점에서 모든 개인은 자신이 편견 없는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더불어 인간의 언어와 관념을 통해서는 결코 자연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루소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에 입각하면 결국 그가 ‘말하는’ 자연의 ‘관념’ 또한 본질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A를 자연이라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B를 자연이라 말할 때 둘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자연일까?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은 결코 일치할 수 없다는 그 자체만이 어쩌면 가장 자연적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하게끔 되어 있다.’, ‘~이 자연에 부합한다.’, ‘~하기 마련이다.’ 등의 서술도 결국 루소의 주관일 뿐 객관화된 자연성이라 이야기할 수 없다.



2.2 루소의 교육론에 내재된 성적편향성


더불어 루소 사상의 치명적인 결함 중 하나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관점이다. 그는 교육론에 관하여 시종일관 자연성을 주창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성은 남녀구분을 넘어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본성이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하는 자연성은 남성인 에밀뿐만 아니라 여성인 소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루소는 에밀에 관해서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관점을 적용하면서도 소피에 관해서는 여성이라는 특수적 관점을 적용한다. 예컨대 에밀의 성장과정을 묘사할 때는 언제나 ‘인간이란 ~해야 한다’라는 식의 서술이 주를 이루는데 반해, 소피에 관하여 언급할 때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주를 이루면서 ‘여성은 ~해야 한다’라는 식의 서술이 주를 이룬다. 남성과 여성 모두 성별구분 이전에 다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소피에 관해서는 여성이라는 특수한 범주가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더불어 소피의 경우를 논할 때 루소는 문명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반전시킨다. 즉 에밀의 경우에서는 문명적 질서가 자연성을 훼손하는 것에 대하여 극도로 경계하면서도, 소피의 경우에서는 여성에게 덧씌워진 문명적 관습을 옹호하는 태도로 돌변하는 것이다. 여성은 조신해야 한다는 것, 여성은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나는 것, 여성은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자연성인가 아니면 문명이 규정한 성별질서인가? 사회를 이루기 전 한 인간을 조명할 때 그 인간이 완전히 독립된 한 명의 인간인 이상 자연과 대면하는 그자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먼저 ‘인간’이다. 루소는 이러한 기초 하에서 남성인 에밀을 분석하였다. 그러나 소피에 대해선 어찌하여 동일한 전제에 입각하고 있지 않는 것인가? 여성에 대해서는 어찌하여 한 명의 독립된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남성에 ‘대(對)해서’ 존재하는 여성이라는 관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인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은 결코 독립된 한 인간인 상태에서는 부각될 수 없는 관념이다. 그것은 남녀 두 명 이상의 인간이 모여 최소한의 사회를 이룰 경우에만 발생할 수 있는 상대적 관념이기 때문이다. 즉 ‘여성’이라는 관념 안에는 부분적으로나마 사회적, 문명적 조건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루소가 남성에 대한 여성이라는 관점을 자연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분명 논리적 오류이며, 여성에 대해서 인간이라는 동일한 전제조건을 생략하는 것은 루소의 논의 내에 성적편향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2.3 루소의 교육론은 진정 인간성 해방의 교육인가


세 번째, 루소의 논의는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지만 이것이 도리어 인간에 대한 자의적 족쇄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진정한 인간이란 자연의 교육에 인간의 교육과 사물의 교육이 뒤따라 각기 조화를 이룰 때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우리는 앞서 루소가 주장하는 ‘자연’이 결코 절대적인 자연 그 자체임 확신할 수 없다고 논한 바 있다. 이는 루소의 자연이 결국 루소가 판단한 ‘주관적 자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루소의 논의에 따라 자연인을 육성할 때 그 교육은 결국 루소가 바라본 주관적 자연에 인간을 끼워맞추는 것이 된다. 이에 따르면 인위적 질서와 형식주의로부터 해방되어 자연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던 그의 주장은 도리어 ‘자연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새로운 인위적 족쇄가 될 수 있다.



3. 마치며


분명 지나친 상대주의는 혼돈을 가져온다. 하지만 자의적인 절대화는 인간에 대한 억압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양자를 공히 경계해야만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시공간적 환경을 완전히 초월하여 사유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천재라 하더라도 시대적 편견의 오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루소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루소의 글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을 걸쳐 전해져온 고전, 현시대를 풍미하는 최신의 논의를 접할 때에도 반드시 이 점을 고려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식에 대한 무비판적인 접근과 학습은 거의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렇게 습득한 지식은 타인 앞에서 좀 더 고상하게보이는 겉치레로 활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사유에 새로운 상상과 활력을 불어넣지는 못한다. 따라서 비록 어색하고 서툴더라도 자신이 가진 사유의 힘을 믿고 자신의 능력 하에서 어떤 지식에 관해서든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지식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믿는다.



+ 이 책은 중고서점에서 구한 책이다.

책의 뒷 면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었다.



어머님께 선물 받은 책이라면 이 책의 본래 주인에게는 소중한 물건이었으리라.

아마 책을 처분하던 중 실수로 이 책까지 처분하게 된 것 같다.

혹시라도 이전 주인께서 보고 계신다면 댓글로 연락주세요.

본인 확인 후 보내드리겠습니다.

  1. 장 자크 루소, 김순화 역, 『에밀Emile』, 청목, (1997) [본문으로]
  2. 장 자크 루소, 김순화 역, 『에밀Emile』, 청목, (1997), pp.12-13 [본문으로]
  3. 장 자크 루소, 김순화 역, 『에밀Emile』, 청목, (1997), pp.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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