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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도서 리뷰 감상] 도스토예프스키 /『악령』총2권 / 블루에이지

by Radimin_ 2016.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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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본 도서의 요약이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마 절판되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했다.



대체로 무난한 번역이라 생각이 든다. 

다만 중간 중간 발견되는 원고상의 오류가 눈에 띠는데

오탈자는 괜찮지만 간혹 인물의 이름이 뒤바껴서 쓰여있는 경우가 있었다.

2~3건 정도 되는데 이러한 오류는 자칫 독자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으므로 이점이 매우 아쉬웠다.



이 작품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간단한 감상을 적어봤는데

체계적인 정리는 아니고 

읽는 중간중간 느꼈던 감상들을 쭉 풀어서 글로 정리해봤다. 



인간사가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삶은 고통과 행복을 아울러 경험한다. 우리는 삶의 고통에 절망하기도 하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행복에 젖기도 하면서 우리의 삶을 조금씩 그려나간다. 그렇게 사람들은 생생한 현실 속에서 생생한 감각으로 배고픔과 충만함을 맛보고, 서로 부대끼며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이렇듯 생생산 삶의 현장 속에서 우리는 종종 뜬구름같은 관념들과 마주친다. '사회란 응당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 라고 외치는 이상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듣게되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마치 어떤 신성한 신의 계시나 날카로운 이성의 명령을 가슴에 품은 듯 어떤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좀 더 강경한 이상주의자들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바칠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한 기세로 세상을 향해 돌진하기도 한다. 그 신념이 설사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기만에 불과할지라도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면서 추호의 의심도 없이 질주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신념이란 대부분 맹목적인 긍정으로인한 일종의 환각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상이 스스로의 실현만을 목적으로하는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이러한 이상은 한 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사회란 점진적인 현실적 증명이 아닌 믿음에 호소하는 약속의 형태이며 미래로 유보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상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신뢰에 의존하며, 이러한 신뢰는 맹신으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즉, 그 이상은 어느 순간 그것을 믿는 이상주의자의 모든 사고를 먹어치우고 그의 머리 안에 자신을 가득 채워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이라고 부른 것이 아닐까 싶다.



'악령'과도 같은 이상을 품은 이상주의자는 자연스러 강력한 매력을 뿜어낸다. 그 매력이야말로 이상이 살아남는 주요한 생존수단이기 때문이다. 구름 위에 살것만 같은 이상주의자와 그의 이상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일종의 신선함을 던져줄 뿐만아니라 고단한 삶을 더 나은 삶으로 바꿔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 마저 불러일으킨다. 자신은 파멸할지라도 자신이 꿈구는 '정의'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바치겠노라 외치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카리스마적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자신의 파멸 조차 불사하는 자인 그가, 과연 타인의 파멸에 대하여 얼마만큼 신경써줄 것인지 말이다. 


필요하다면 그는 그의 이상을 위해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을 주저없이 파멸시킬 것이다.


 『악령』에 등장하는 뽀뜨르는 바로 그러한 이상주의자였다.


더욱이 그러한 이상주의자의 '나는 나의 이상을 위해 기꺼이 파멸할 것이다!'라는 선언은 증명될 수조차 없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정의와 이상에 따라 기꺼이 희생시킬 때 그는 파멸하지 않은 채 남는 것이다. 파멸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희생자들이다. 그의 파멸은 그저 그의 말 속에 머물러있을 뿐이다. '나는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파멸해버리면 나의 이상과 정의를 이룰 자가 과연 누가 있을 것인가?'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상을 위해서라면 파멸도 불사할 것이지만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꼭 필요하므로 자신의 파멸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 악령에 씌인 이상주의자들의 이 명백한 모순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부단히 목도해왔다. 실제로 그들의 파멸은 오직 피할 수 없을 때만 찾아왔다. 파멸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지독하리만치 그 기회를 잡아 생존해왔던 것이다.


우리 보통의 사람들은 우리가 발딛고 있는 선명한 현실 속에서 현실과 부닥치며 자신의 삶을 충실히 꾸려왔다. 지겹고 무료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간간히 삶의 진리와 행복을 깨우쳐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은 그 자체로 사회에 대하여 정화기능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의 이웃에 대하여 사랑과 우정어린 관심으로 때로는 격려와 칭찬을, 때로는 따가운 질책을 하면서 그들이 속한 사회를 정화하고 유지해나가는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기까지 한 이러한 유대를 변질시키거나 분쇄하는 것은 바로 이상주의자들이 고안해낸 형이상학적 관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예로 우리는 과거 광적인 집단신앙으로 변질된 사회주의/공산주의를 보았으며, 현재 악마의 맷돌과 같이 무서운 속도로 모든 가치를 돈으로 분쇄해나가는 현대자본주의를 목도하고 있다. 그것들은 각각 저마다의 아름다운 이상을 확신에 찬 어조로 외쳐댔지만 그 대가로 사람들의 생생한 삶에서의 희생을 요구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상의 탈을 뒤집어쓴 악령들을 우리의 정치에서 부단히 목도해왔다. 그들은 항상 아름다운 이상을 내걸고 좀더 나은 삶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그 공약이 지켜진 적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고결하고 거대한 이상은 '1,000원 더 저렴한 한 끼'보다 항상 우위였다. 그들은 자신의 이상을 맹신하여 국민들의 비참한 삶 앞에서도 '천국으로 가기 위한 고된 여정' 쯤으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난 이것을 단순한 포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믿을 것이다. 언제나 맹신은 거짓보다 위험하다)


더불어 그 이상주의자들이 '더 나은 삶'을 이행할 수 없는 이유가 또 있다. 


이상주의자들은 언제나 자신과 다른 이상주의자들을 적으로 두고 있다. 하나의 이상은 언제나 그 적수를 두고 있기 마련인데 적이 없으면 그들은 기필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이상주의자들의 맹신은 적의 존재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며 나는 이점을 확신한다. 그들은 상대진영이 절멸할 때까지 이념적인 전투를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한 쪽도 완벽하게 절멸하지 않는다. 그들이 아무리 자신의 이상을 완벽하다 여겨도 그 속엔 언제나 빈틈과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상대진영의 양점과 모순을 발견하려 혈안이 되어있기 때문에 서로 물고뜯으며 상대의 이상을 공격한다. 이러한 이상주의자들의 전쟁은 언제나 최우선의 과제로 여겨진다. 때문에 대다수 민중들의 현실적 삶은 이 끝없는 전쟁 뒤에 언제나 2순위로 남겨져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로 부터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갈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찌보면 어리석인 일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도 이점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악령에 물들지 않은 진정한 이상주의자와 진정한 현실주의자를 발굴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상에 함몰된 자와 마찬가지로 현실적 이해관계에만 매몰된 자들도 배척해야한다. 그러한 사람은 반드시 부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정한 이상을 담은 사람을 찾아 우리의 민주적 대표를 선출해야한다. 그 이상은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최우선으로 삼는, 삶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이상이어야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이상주의자는 진정한 현실주의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진정한 이상은 그 어떤 삶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파멸시키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삶이라도 그 이상이 아름답게 만들어갈 목적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이상주의자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생생한 삶을 편견없이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상주의자들이 심어놓은 수많은 편견들을 벗겨내고 진정 우리의 삶에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떤 모습일지를 현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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