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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도서 리뷰 감상] 루쉰 /『아Q정전』/ 문예출판사

by Radimin_ 2016.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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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은 1911년 신해혁명 직전의 중국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루쉰의 소설이다.[각주:1]



주인공 아Q는 중국 어느 지방의 최하층 계급으로 살고있는 품팔이다. 이 아Q란 인물의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극도의 어리석음과 졸렬함이 될 것이다. 그는 매우 변덕이 심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생각은 짧다못해 어리석고, 겁은 무지 많아서 강자 앞에선 한없이 비굴하나 약자 앞에서는 어떻게든 자신을 과시하지 않으면 못베기는 성격을 지녔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당황스럽다 못해 우스꽝스러워서 독자로 하여금 실소를 흘리게 만들어버린다. 

오늘날 소위 '정신승리'라고 하는 말이 넷상에서 유행하고 있는데 이 말은 사실 루쉰의 『아Q정전』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Q는 종종 그 지방 건달들에게 두들겨맞고는 했는데, 그럴때마다 그는 곧장 '내가 이렇게 맞은 것은 어른이 한낱 어린아이들에게 맞은 것과 다름없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이고 나는 어찌됐든 어른이므로 난 그들에게 승리한 것이다.' 라는 식의 생각을 하며 유쾌해하곤 했다. 또한 건달들에게 버러지라는 모욕을 듣자 '나는 버러지중에 제일 가는 버러지이므로 버러지의 제1인자이다. 여기서 버러지라는 앞부분만 제외하면 나는 제1인자인 것이다. 따라서 저들이 제1인자인 나에게 비기겠는가? 나는 승리한 것이다.' 라는 식의 생각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키길 즐겼다. 아Q의 이러한 발상법을 루쉰은 <정신적 승리법>이라 불렀던 것이다.


(아Q가 정신적 승리법을 시전하고 있다)


이 어리석은 아Q는 자신과 비슷비슷한 그의 고장 사람들 사이에서 멸시와 모멸을 서로 주고받으며 자신의 어리석은 행각들을 이어나간다.


그러던 차에 아Q는 '자유당'이라고 하는 혁명세력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사실 그는 혁명이란 것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그는 혁명에 대하여 매우 큰 관심을 보인다. 아Q에게 있어 혁명이란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내 자존심을 세우고 뽐낼 수 있을까?'. 정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만약 사람들 앞에서 거만을 떨 수 있고 자신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다면 그는 기꺼이 자신의 허풍 속에서 혁명세력이 될 수도 있었고, 반대로 혁명진압자가 될 수도 있었다. 

이런 시덥잖은 고민의 결과, 아Q는 혁명세력의 편에 서는 것이 자신의 자존심을 추켜세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리고는 자신을 혁명세력의 일원이라 상상하면서 자신을 무시했던 마을사람들에게 복수할 생각에 신이난다. 그리고는 평소의 어리석은 행실처럼 '혁명'과 '모반'을 외치면서 마을을 실컷 쏘다닌다. 그 후 그는 자신의 망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마을 안에 있던 자유당 당원에게 찾아간다. 그 자유당 당원은 평소 아Q가 '가짜 양귀신'이라 부르며 멸시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이 서양학문을 배우고와선 변발을 풀고 서양인의 양식대로 꾸미고 다녔는데, 아Q는 이를 못마땅히 여겨 그에게 가짜 양귀신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지금껏 멸시했으나 이제는 자신의 망상을 실현시켜줄 유일한 인물인 그 가짜 양귀신 앞에서 아Q는 자신이 혁명세력 앞에 투항할 것이며 자유당에 합류시켜주길 요구하지만 문전박대를 당한다. 아Q는 자신을 내친 그 양귀신을 원망하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 후 그는 혁명세력으로 추정되는 무리로부터 마을 유지의 집이 약탈당하는 것을 목격하는데, 이를 보면서 아Q는 자신을 끼워주지 않은 양귀신과 혁명세력을 더욱 원망한다.

그 일이 지나고 아Q는 갑자기 어떤 무리들에게 잡혀 끌려간다. 그들은 진짜 혁명세력으로 추정되었다. 아Q는 그들 앞에서 약탈을 자행한 세력에 대해 아는대로 말하라며 심문을 받는다. 이때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덜덜 떨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한다. 몇 차례 심문이 더 있고 난 뒤, 그들은 아Q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에 불과하단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부드러워진 어조로 그에게 어떤 문서를 내밀며 서명할 것을 요구한다. 이 때 아Q는 자신은 일평생 붓 한 번 잡아본 적 없으며 서명이 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에게 동그라미라도 그리라고 말한다. 그 말에 아Q는 심혈을 기울여 동그라미를 그리지만 붓을 처음잡아본 터라 붓이 튕겨져 동그라미를 망친다. 아Q는 그 문서와 서명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모르는 채 동그라미를 망쳐버린 것에 마음을 쏟는다. 사실 그들의 의도는 자신들을 빙자하여 혁명세력으로 꾸미고는 강도짓을 벌이는 강도무리에 대하여 일벌백계를 하는 데 있었다. 즉 강도떼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어 그들의 체면을 다시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아Q가 진짜 강도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서명을 마친 아Q는 형장으로 끌려가고 결국 총살당한다.


이 아Q라는 인물은 신해혁명 당시의 중국 민중을 표상한다. 중국 민중에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루쉰은 아Q를 통해 중국 민중의 노예근성을 풍자하려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작품을 쓰면서 점차 피압박자로서의 민중에 대한 동정과 연민으로 변화해갔던 것 같다. 그 어떤 대의를 지닌 혁명이라도 결국 민중은 피해자가 되었다. 무지와 어리석음은 아Q의 속성이다. 이 점은 비웃음을 받을만한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를 들어 '악'이라고 할 순 없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끝내 아Q가 처형을 당해야할 합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말 그대로 그는 처형당할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혁명이나 대의 같은 숭고하게 여겨지는 관념들은 하나같이 다수 민중의 행복을 소리친다. 그러나 그 행복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희생되곤 했다. 사실 희생이란 말보다는 살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역사 속에서 그들은 부단히 살해당한 것이다. 민중들은 행복과 생명을 따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면서 행복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단순하지만 명백한 진리이다. 혁명을 꿈꾸고 지도하는 자들은 그들의 대의를 위해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폭포를 따라 떨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짓밟고 올라간다. 그렇게 폭포의 정상에 도달하면 그곳에 자신의 깃발을 꽂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깃발을 빼앗기위해 폭포를 오르는 자를 사냥한다. 이 과정에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폭포의 정상에선 깃발만이 바뀌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폭포 아래앤 흐름에 따라 평범한 삶을 살아갔던 수많은 민중들의 시체가 쌓여있곤 하는 것이다.

아Q라는 인물에게선 그 어떤 선이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어리석음과 졸렬함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희생되어도 될만큼 하찮다고 할 수 있을까? 고귀함과 하찮음, 선과 악은 모두 지배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립된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고귀함과 하찮음이 갈리며, 지배자에게 좋은 것은 선으로, 나쁜 것은 악으로 정립된다. 이러한 선악의 자의성 속에서 피지배자인 일반민중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했다. 일반 민중들의 삶을 강탈하면서까지 지켜야할 숭고한 대의란 과연 무엇일까? 아Q는 어리석은 자였다. 하지만 그도 한 명의 인간이자 민중이었다. 신해혁명이 공화주의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루쉰이 그려낸 아Q의 죽음은 혁명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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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루쉰, 정석원 역, 『아Q정전, 광인일기』, 문예출판사, (20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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