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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학술

[도서 리뷰 정리] 에리히 프롬 /『자유에서의 도피』(자유로부터의 도피)/ 범우사

by Radimin_ 2016.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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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자유에서의 도피』[각주:1].



번역에 따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도 불리운다.


우리는 헌법에 명시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과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정해진 나이에 정해진 행동과 정해진 성별에 정해진 역할들. 우리는 무언가 정해진 것 안에서 그것을 쟁취하기위해 주변 사람들과 피땀흘려 경쟁하곤 하지만, 막상 왜 그래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먹고 살기위해서'와 같은 어딘가 싱거운 이유 뿐이거나 혹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추상적인 이유 말고는 들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그리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이유모를 불안과 공허함은 도대체 내가 자신의 삶을 잘 꾸려가고 있는건지 알 수 없게 만든다. 모든 걸 하나하나 뜯어보면 나만의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갖고 있는, 모두가 하고 있는, 모두가 생각하는, 모두가 꿈꾸는 그런 똑같은 조각들 중 하나라는 생각이 스스로를 무의미함 속에 던져넣는다. 우리는 이미 스스로의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 갖고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이러한 자유를 갖고도 우리는 우리의 삶과 행복을 적극적으로 잡아나가고 있다는 확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일까? 이러한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당신에게 당신의 자유와 당신의 삶, 당신의 자아를 바라보는 관점에 많은 실마리를 던져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정신분석가이자 사회학자, 철학자였던 학자 에리히 프롬의 사상서이다. 1900년에 태어난 그는 격랑의 시대를 살아왔다. 1914-1918년의 제1차 세계대전과 1939-1945년의 제2차 세계대전, 전간기에 불어닥친 대공황, 온갖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범람과 충돌 속에서 그는 과연 근대인이 과거의 습속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는가를 고민하게된다. 그 고민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탐구의 결과물이 바로 『자유에서의 도피』이다.


일반적으로 사상서나 철학서, 학술서 등을 독해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이러한 책들은 복잡한 사유와 논리가 담겨있고,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사유를 언어로 풀어가기 때문에 문장의 가독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책은 사상서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독해하기 수월하다. 문체나 논리전개방식을 보면 독자들이 접근하기 편하도록 전반적으로 풍부한 예시와 친절한 설명, 간결하고도 명확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곳곳에서 서술자의 독자에 대한 배려를 발견한다. 따라서 스스로 배경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학술적 문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 책에 접근하고자 할 때 부담가질 필요는 없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이제부터 이 책의 내용을 인용과 함께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 책이 주장하고자 하는 점은 단 하나의 용어로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다. 


바로 <자유의 양면성>이다.


근대에 이르러 인류는 과거 중세 봉건적 정치체제로부터 해방되어 이른바 '~로부터의 자유'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자유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았다. 해방으로 인한 자유와 더불어 스스로 무엇을 향해 나아갈 자유가 달성되어야만 인류는 진정으로 자유상태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는 해방을 통해 자유의 단면을 획득하였지만, '~로의 자유'를 획득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해방 이후의 자유는 마치 아무런 목적의식없는 한 개인을 황무지에 던져놓은 꼴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개인은 주체의식과 목적없는 자유의 한복판에 던져져 무의미성과 무력감, 고립과 불안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를 견디지 못하게된 개인들은 자유이전의 상태 즉, 예속상태가 주었던 안정감을 되찾기 위하여 복종을 추구한다. 그 결과 인류는 제2의 예속상태로 접어들게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이 책은 '자유에서의 도피'라고 명명했다.


어떤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한다는 것은, 집단의 구성원에서 한 개인으로 발전해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는 개인의 개성화로 이어진다. 개성화는 개인에게 독립과 자유를 의미한다. 하지만 동시에 증대되어가는 고독, 무력감, 불안감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번 개성화가 진행되면 그것은 역행이 불가능하다. 이는 마치 탯줄 절단을 통해 아이가 어머니의 육체에서 분리되는 것과 비슷하다. 만약 이에 대하여 아이가 충분히 그 분리와 독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태내로의 역행을 시도한다면, 그 역행은 정신적으로 진행되고 아이는 정신병에 걸릴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게 된다. 이처럼 이미 벗어난 예속에 대하여 역행이 불가능함에도 개인이 독립과 자유의 대가로 직면한 무력감과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그는 안정감을 찾아 태내로 역행하고자 하는 아이처럼 복종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복종만이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과 외부체계가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아닌 상호자발성을 유지하는 관계가 된다면, 그 안에 놓인 개인은 비로소 '~로의 자유'를 달성할 수 있는 조건을 얻게된다. 이러한 관계는 개성을 배제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결부되어 특히 외부세계는 개인의 자발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자발성을 매개로 다른 개인들 간에 동일성에 의한 흡수가 아닌, 다양성에 의한 새로운 친밀감과 유대감을 형성한다면 그 개인은 자유로부터 오는 불안과 고독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로부터의 자유'가 '~로의 자유'로 이어지지 못하고 한없이 지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유를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 느끼게끔 만들고 복종에 대한 강력한 갈망을 발생시킨다. 개인의 무가치성, 근본적인 무능력, 복종 욕구에 대한 강조는 히틀러 이데올로기의 주요 테마였는데, 이것은 바로 인류의 자유에서의 도피 현상이 낳은 끔찍한 귀결이었다. 히틀러의 이데올로기는 당시 독일사회에 팽배해 있던 국가적 위기,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저축자들의 몰락,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로 인해 방향을 잃게된 개인들의 자립성과 자발성을 독일민족이라는 하나의 응집체로 집중한 결과물이었다.


이렇듯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한 자유의 양면성에 대하여, 이 책은 한 장을 할애하여 종교개혁과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며 이 문제의 뿌리를 고증해나간다. 



■ 르네상스, 종교개혁, 개인주의 


중세사회의 주요한 특징은 개인의 자유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중세사회의 구성원들은 태어날 때부터 고정된 지위를 갖고 태어나 죽을 때 까지 그 지위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살았다. 그러나 이러한 예속상태는 한편으론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일종의 안정감을 주었다. 그들의 삶은 풍족하지 않았고 심지어 비침하기까지 하였으나, 그들은 그 비참한 가난 속에서도 결코 불안이나 무의미성을 느끼진 않았다. 


개인에 대한 억압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개인'이란 관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세사회 구성원들은 시원적연 결연을 통해 외부세계외 결합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회적 역할이라는 매개를 통해 비로소 자기 존재를 의식했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접어들어 중앙집권이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자본과 개인의 경제적 창의성, 경쟁이 중요시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개인주의가 현저하게 성장하게 되고 유럽은 르네상스 시대를 맞게된다. 이 때 비로소 근대적 의미에서의 개인이 등장하였다. 즉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개인으로서 분리된 실체로서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 당시 르네상스와 더불어 발전하였던 자본주의 역시 개인을 해방하기 시작하였다. 이전 시대에서는 장인과 기술자들은 길드에 종속되어 있었고, 그 체제는 견고하고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독점의 폐해를 불러일으켰고 때마침 자본주의의 발전은 시장의 해방을 추동하여 경제활동에서의 개인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자본주의는 상층계급의 사조이자 문화였으며 그들은 대중지배를 위해 하층계급에 대한 착취를 거듭하였다. 이에 대한 하층계급의 억압된 의식을 기화로 루터주의와 칼뱅주의라는 종교개혁 사조가 등장하기 사작하였다.  


루터주의와 칼뱅주의를 위시한 종교개혁 또한 르네상스와 마찬가지고 개인해방의 사조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이와 더불어 해방의 자유가 가져온 하층민들의 불안과 무력감에 대하여 일종의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종교개혁은 신앙구원이란 개인적 체험이라는 주장을 통해 교회의 권위를 빼앗아 이를 개인에게 부여하였다는 점에서 개인을 종속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자신의 부패성과 무력성을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위해 필요한 조건임을 주장함으로써, 자유로부터 파생되는 불안, 무의미성, 무력성을 개인으로 하여금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수용을 통해 개인은 신앙세계의 하나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무력감을 극복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신앙세계에 대한 제2의 예속을 통해 자유와 무력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 때의 개인은 압도적인 힘(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무력한 도구가 됨으로써 불안감을 해소하게 된다.


특히 종교개혁 사조 중에서 칼뱅의 예정설은 이후 나치 이데올로기 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칼뱅의 예정설이란 쉽게 말해서 태초부터 이미 구원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는 예정되어 있다는 것인데, 구원받는 자는 당연히 세속에서도 성공할 것이므로 결국 근면성실함을 통하여 세속에서 성공을 거둔 자는 자신이 구원받을 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는 신학적 주장이다. 나치는 이를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수용하여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며, 그 불평등함 가운데 아리안 인종만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므로 독일민족은 전 인종과 민족과의 승리를 통해 이를 증명해야 한다는 논리로 변질시켰다. 종교개혁 당시 자유로 인한 불안과 무력성을 종교개혁이 흡수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논리는 나치즘에게 당시 독일국민들의 극도의 무의미성, 무력성을 흡수할 수 있는 사상적 힘을 제공하였다.


자유의 양면성에 관한 역사적 접근을 마친 후 이 책은 자본주의 고도 발달이 개인의 인격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고 있다.



■ 자본주의 고도 발달이 개인의 인격에 미친 영향


중세체제로부터의 탈피를 통해 인류는 자유의 낡은 적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자유의 새로운 적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외부적 요소로부터의 해방이요, 동시에 내부적 요소와의 대면이었다.


봉건제도를 벗어나 자본주의 제도로 접어들어 인류는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시작하였다. 인류는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했으며 신비적 요소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였다. 동시에 정치적 자유도 성장하여 중산계급이 정치 권력을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즉 자본주의는 전통적 속박에서 인류를 해방시켰으며 능동적 자아를 성장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류는 한층 더 고립되고 격리되었으며, 무의미와 무력감의 증대를 경험해야했다. 자본주의 제도 속에 속한 사람들은 각각 자본주의 제도에 걸맞는 지위와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노동자와 공장주가 있었다. 그들은 자유를 획득하고 또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삶을 영위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로의 자유'를 획득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라는 것이 '노동자'나 '공장주'가 아니라 정서적이고 지성적이며 감각적인 구체적 인간을 의미한다면, '그의' 목적이라고 생각되고 있던 많은 것들은 사실 그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구체적 인간으로서 '자신만의 목적으로의 자유'를 향유한 것아 아니라 '자본주의적 역할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즉 자본주의는 개인을 긍정하였지만, 개인들에겐 되려 자기부정과 금욕주의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앞서 책에서 소개한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직결된 것이었다. 


중세사회에서는 경제적 활동은 하나의 목적에 대한 수단이었다. 그 목적이란 인생 그 자체였으며, 인간의 정신적 구원이었다. 욕망의 결여가 근대 사상에서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과 똑같이, 중세 사상가에게는 경제적 욕망에 가득찬 것이 비합리적으로 여겨졌다.


자본주의에서의 경제적 활동과 성공은 물질적 획득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자본주의체계는 개인 그 자신의 행복과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체계의 목적, 즉 자본주의 발전과 자본축적을 위해 굴러간다. 그리고 이 목적에 기여하는 일이 인간의 운명이 된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체계 내의 인간은 무의미의 심연 속에 내던져진다. 


인간은 이윤을 얻기위해 일하지만 이러한 이윤은 소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본으로 투자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자본의 재투자를 통해 다시 더 큰 이윤을 발생시키고 이는 또 다시 재투자되는 주기적 반복이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프롬은 이렇게 쓴다. 


"이러한 원리는 객관적으로는 인류의 진보에 대해 커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주관적으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초인간적인 목적을 위하여 일하게 하고, 인간이 스스로 만든 바로 그 기계의 하인으로 타락하게 했으며, 개인의 무의미함과 무력함의 감정을 인간에게 남겨주었다."[각주:2]


자본주의는 분명 개인의 개성과 독립성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파생된 불안과 무력감, 무의미성에 대해서는 재산, 권력, 명성 등의 것으로 이를 은폐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따라서 한 개인이 느끼는 안정감은 재산, 권력, 명성 등이 존재하는 한해서만 계속될 수 있었고, 만약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서 사라진다면 그는 한 순간 무력함과 무의미의 나락 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프롬은 자본주의적 광고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광고와 정치적 선전 등은 개인에게 아첨하여 그를 중요한 존재인 양 만들며 그의 비판적인 판단과 식별감에 호소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지각력을 우둔하게 하고, 그의 결정에 대한 개인적인 성격을 어리석게 만든다."[각주:3]


자유의 양면성 속에 숨겨진 고독이라는 음울한 그림자는 일찍이 키에르케고르, 니체, 프란츠 카프카 등의 사상가들에게서 예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각자들의 지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를 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보며 비관적인 인식을 내비친다.


"그렇지만 이러한 저술가들에 의해서 표현된 바와 같은, 그리고 소위 수많은 신경증 환자에 의해서 느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런 개인의 고독감과 무력감을 평균적인 정상인은 전연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겐 이는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내일의 일상적인 그의 활동과 개인적 및 사회적인 여러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확신과 찬성, 사업상의 성공, 모든 종류의 오락, '재미있는 일', '교제하는 일', '놀러다니는 일' 등으로 덮여 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어봐도 빛은 보이지 않는다. 고독과 공포와 당혹은 여전히 남는다.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그것을 견뎌낼 수는 없다. 그들은 만일 소극적인 자유에서 적극적인 자유로 전진할 수가 없다면 결국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할 것임에 틀림없다."[각주:4]



■ 도피의 심리과정


프롬은 한 장을 할애하여 개인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심리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즉 '자유의 문제에 있어서 개인 행동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결연관계의 단절 즉, 예속관계의 단절 이후 개인에겐 두 가지 길이 열려있다고 이야기한다.


첫 째는 자발적으로 그 자신을 외부세계에 결부시키는 것으로 적극적 자유로의 이행의 길이고, 둘 째는 그로부터 자유를 포기하게 하는 것으로 자아와 외부세계 간의 간격을 없애 고독감을 극복하고 노력하게 하는 길이다.


이 중 후자가 바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고 프롬은 이야기한다.


이러한 도피의 과정을 프롬은 권위주의, 파괴적 경향, 자동인형적 일치라는 세 가지 요소로 나누어 분석한다.


권위주의란 "인간이 그 자신의 개인적 자아와 독립을 포기하고 또 그 개인적 자아에 결여되어있는 힘을 획득하기 위하여 자기 이외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그 자신을 융화시켜가려고 하는 경향"으로 "이미 잃어버린 제 1차적인 속박 대신에 새로운 '2차적 속박'을 추구하는 경향"이라고 프롬은 정의한다[각주:5].


그리고 이러한 권위주의적 경향이 띠는 두 가지 양태를 각각 매저키즘적 노력과 사디즘적 노력으로 구분한다. 매저키즘적 노력과 사디즘적 노력에는 참을 수 없는 고독감과 무력감에서 개인을 도피시키고자하는 경향이 있다. 


이중 매저키즘의 목적은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서 자기를 상실하는 일>이며, 자유라는 짐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매저키즘적 노력은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이나 권력에 복종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특히 이러한 매저키즘적 노력을 만족시키는 문화의 예로 파시즘을 들 수 있다. 매저키즘적 노력을 보이는 사람은 파시스트의 이데올로기에 복종함으로써 압도적인 힘을 따르고 추종하는 수백만의 사람들 속에 파묻혀서 그 안에서 안정감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매저키즘적 해결은 참고 견딜 수 없는 상태에서 나타나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개인으로 하여금 새로운 괴로움에 사로잡히게 할 뿐이다.


(흔히 성적 도착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알려져있는 매저키즘적 도착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매저키즘적 노력과 구분되어야한다. 여기서 이야기한 매저키즘적 노력은 도덕적 매저키즘으로 인격적 영역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매저키즘적 도착은 육체적 영역에 제약되어 있으며, 도덕적 매저키즘은 전 인격적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매저키즘적 노력에 관해 프롬은 이렇게 쓰고 있다.


"매저키즘은 자기 밖에 있는 보다 더 크고 강력한 전체의 일부분이 되어 그 속에 몰입하고 그것에 참여하려고 한다. 이러한 힘은 개인과 제도와 하나님과 국가와 양심, 그리고 육체적 강제가 될 수 도 있다. 동요함 없이 강력하고 영원하며 매력적인 힘의 한 부분이 됨으로써 사람은 그 힘과 영광에 참여하고자 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고 그가 가지는 모든 힘과 자존심을 포기함으로써 개인으로서의 통일성을 상실하고 자유를 포기한다. 그러나 그는 몰두하고 있는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안전과 새로운 자존심을 획득한다. 매저키즘적 인간은 그의 주인이 외부적인 권위이든 내면화된 양심이든 또는 심리적인 강제이든 간에 결정을 내리는 일에서 구원된다."[각주:6]


반면 사디즘 충동의 본질은 타자를 완전히 지배하는 쾌락이다. 

"사디즘적 인간은 말살됨으로써 안전을 추구하는 대신에 다른 어떤 사람을 말살함으로써 안전을 획득한다. 매저키즘은 외부적 힘 속에 나 자신을 해소하고, 사디즘은 다른 사람을 자기의 일부분으로 만듦으로써 나 자신을 확대시킨다. 어느 경우에서도 개성과 자유는 상실되고 있다."[각주:7]


이처럼 사디즘과 매저키즘에 관한 고찰을 통틀어 사도-매저키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프롬은 이 책에서 사도-매저키즘이란 정신 병리학적으로 도착증이나 신경증을 설명하는데 쓰이는 관념이기 때문에 이 용어 대신에 '권위주의적 성격'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프롬은 이 다음 파괴적 경향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나 비중있게 다루지는 않고 그 다음 '자동인형적 일치'라는 개념에 비교적 주안점을 두고 설명한다.


프롬에 따르면 자동인형적 일치란 근대 사회에 있어서 대다수의 정상적인 인간이 취하고 있는 불안과 고독의 해결방법이다. 이것은 "개인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중지하는 것", 이며 "그는 문화적인 유형에 의해서 그에게 부여된 인격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개인적 자아를 포기해버린 자동인형이 되어 그의 몇백만의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그는 더이상 고독과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는 매우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아의 상실이다.[각주:8]


"우리들 중 대다수는 스스로를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근대적 개인주의 사조의 일반적인 의견이며, 각 개인도 자기는 다름아닌 '자기'이고, 그의 사상, 감정, 욕구 등도 '그 자신의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고 있다. 비록 우리들 중에는 진정한 개성을 가진 이도 있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신념은 대체로 하나의 환상이며, 이 같은 사정의 원인이 되고 있는 조건들을 제거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것은 일종의 위험한 환상이다."[각주:9]


즉 자동인형적 일치는 자유의 결과 직면하게된 고독과 불안, 무력감에 대한 심리적 도피의 일환으로 자아의 상실을 경험하게 되었으나, 사람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외부의 감정, 외부의 의지, 외부의 욕망, 외부의 자아를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것 마냥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착각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각종 심리적 현상(대표적인 예로 우울증)마저 제대로 그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은폐된 진정한 자아와 이를 덮고있는 가짜 자아 간의 틈으로부터 심리적 병증이 발생하고 괴로운 감정이 솟아오르지만 이러한 틈을 인지하지 못하는 개인은 그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저 견딜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안의 뿌리를 제거하지 않고 그저 그에 대해 잊어버리게 만드는 도피의 심리적 매커니즘 중 하나가 된다.


다음 장에서는 여기까지의 분석을 토대로 나치즘의 심리를 해부하고 있다. 앞 부분까지의 분석을 통해 중요한 일반원리적 분석과 개념을 간단히 정리하여 살펴보았으므로 이 장은 여기서 정리하지 않기로 한다.


마지막 장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마지막으로 프롬이 기대하는 앞으로의 미래상을 비교적 구체화하여 소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든 지상 최고의 가치 중 하나로 꼽는 것이 바로 '자유'이다. 역사적으로도 자유를 잃은 사람은 차라리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사람들은 자유를 사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은 한편으로는 자유를 갈망하고 있지만, 자유를 불완전하게 획득함으로써 오히려 견딜 수 없는 불안과 무력함에 봉착하여 스스로 자유를 버릴 수 있다는 다소 충격적인 주장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주장을 촘촘히 엮어가는 논리들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바라보지 못했던 자유의 다른 부분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얻게 된다. 여기서 간단히 정리한 것 만으로는 책의 내용파악에 그칠 뿐 이 책의 깊은 통찰과 직관을 느낄 수 없다. 혹시라도 위의 정리한 내용으로부터 이 책에 흥미가 생긴 사람은 반드시 1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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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리히 프롬, 이상두 역, 『자유에서의 도피』, 범우사, (1993) [본문으로]
  2. 에리히 프롬, 이상두 역, 『자유에서의 도피』, 범우사, (1993), pp.145 [본문으로]
  3. 에리히 프롬, 이상두 역, 『자유에서의 도피』, 범우사, (1993), pp.165 [본문으로]
  4. 에리히 프롬, 이상두 역, 『자유에서의 도피』, 범우사, (1993), pp.168 [본문으로]
  5. 에리히 프롬, 이상두 역, 『자유에서의 도피』, 범우사, (1993), pp.177 [본문으로]
  6. 에리히 프롬, 이상두 역, 『자유에서의 도피』, 범우사, (1993), pp.192 [본문으로]
  7. 에리히 프롬, 이상두 역, 『자유에서의 도피』, 범우사, (1993), pp.194 [본문으로]
  8. 에리히 프롬, 이상두 역, 『자유에서의 도피』, 범우사, (1993), pp.223 [본문으로]
  9. 위의 책, 위의 장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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