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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자료

자크 라캉 『에크리』 핵심 개념 정리

by Radimin_ 2016.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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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에크리』 정리



현재 국내에 자크 라캉의 에크리를 번역한 서적은 없다. 

단지 몇 권 안되는 에크리 해설서만이 있을 뿐이다.

위 책은 그 중 국내 저자가 집필한 에크리 해설서로서 비교적 자세하고 이해하기 쉽게 해설해놓은 괜찮은 해설서이다.

본인도 이 책을 통해 자크 라캉의 에크리를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모든 것은 문자와 더불어 시작된다. 그리고 문자는 도둑맞은 편지처럼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그때그때 새로운 사건들과 의미를 발생시킨다. 인간은 자신이 상징계의 주인이라고 착각하지만 정작 상징계의 구성요소인 시니피앙에 의해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일방적으로 부여받는다.

 

상징계가 인간의 운명과 역할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L도식이 의미하는 것은 언어가 상상계의 작용을 거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본래 의도가 왜곡되면서 말하는 주체에게서 무의식의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라캉은 언어 작용의 결과인 주체분열의 논리를 통해 무의식 주체의 위상을 설명한다. 주체는 시니피앙에 의해 대리됨으로써 담론 속에 출현하면서 동시에 사라진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코기토가 다름 아닌 과학의 주체로 과학은 주체의 분열을 완전하게 봉합할 수 없다는 것이 강조된다. 반면에 정신분석이 강조하는 진리는 분열되고 소실된 무의식적 주체의 진정한 자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진리는 분열을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면화하며, 주체 내부에 결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불안한 진리이다.

 

상징계는 시니피앙에 의해 구성되는데 그것은 주체에 대해 원인이자 구조로서 우월한 지위를 누린다.

 

라캉은 주체가 상상계의 자아를 매개로 존재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상징계가 보다 근본적이지만, 주체는 먼저 거울에 비친 외화된 신체 이미지에 대한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자아라는 최초 실체를 획득한다. 자아 없는 주체는 불가능하다.

 

자아는 주체의 진정한 본질이 아니며 오히려 주체를 속이는 기만적 환영이다. 상상적 동일시는 상징적 동일시에 의해 실존적 의미가 부여되면서, 주체의 구조를 분열과 사라짐의 형태로 규정한다. 주체의 구조는 시니피앙의 연쇄 속에서 사라지는 진정한 주체와 대상화된 이미지의 형태로 상징계에 자리를 잡는 자아를 동시에 고려할 때에만 이해된다.

 

상징계는 주체의 개인적 세계가 아니라 복수의 주체들을 상이한 역할 속에서 배치하는 상호주체성의 구조라는 사실이 암시된다. 상호주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대타자라는 개념이다. 자아와 주체의 구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상징계를 대표하는 대타자이다.

 

욕망의 주체와 무의식의 주체는 동의어이다.

 

욕망의 전제는 분열된 주체이다.

 

정신분석의 담론과 기술은 욕망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욕망이 향하는 대상이 바로 남근이다. 남근이란 섹슈얼리티를 지시하는 중심 시니피앙으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과정에서 아이의 욕망을 끌어당기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남근은 상상계가 아니라 상징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버지는 남근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욕망은 대타자의 소유로 가정된 남근을 향하기에 구조적으로 대타자의 욕망에 종속되게 된다. 무의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

 

자아나 의식은 거울 속에 비친 평면 이미지에 스스로를 투영하고 동일시함으로써 생성된 주체의 거짓 외관에 불과하다. 진정한 본질이 아닌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는 주체의 구조를 타자의 욕망에 예속시키는데 이것은 주체가 겪을 수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리고 거울단계에서 아이는 실제 미숙한 몸과 거울이 보여주는 완벽한 이미지의 괴리감을 겪게 되고, 원초적 자가 성애가 조각난 몸의 환상처럼 주체를 엄습한다는 것이 강조된다.

 

상상계는 속이는 질서이지만 주체의 대리자인 자아가 형성되는 단계로 우리는 상상계의 매개 없이 절대로 현실을 인식할 수 없다.

 

상상계와 상징계(그리고 실재계)는 상호 단절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상징계 안에서의 상호 주체성의 구조는 상상계의 개입을 통해 뒤틀리기도 하고, 실재계는 상징계와의 관계 속에서 상징계에 무의식적 욕망의 형태로 구멍을 내기도 한다.

 

언어의 구조는 라캉이 새롭게 변형한 소쉬르의 연산식 S/s에 의해 설명되는데 연산식은 순수 차이인 시니피앙의 질서가 주체와 의미화를 낳는다는 뜻이다. 시니피앙은 연쇄적 결합 속에서 사슬의 형태로만 존재하는데 시니피앙의 작용은 무의식의 법칙인 은유와 환유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라캉은 설명한다. 시니피앙은 이성을 대신하는 새로운 로고스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욕망은 대타자로부터 오는 인정을 욕망하기에 필연적으로 욕망은 대타자의 법에 종속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욕망은 대타자의 결여에 직면해 그것을 넘어보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상징계는 주체를 도래하게 만들고 지배하지만 주체의 욕망에 완전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이 지속되는 진정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징계의 또 하나의 얼굴인 죽음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죽음은 무의식 속에서 작용하는 상실의 기억을 통해 주체에게 체험된다. 주체는 상징계를 통해 존재성을 획득하면서도 동시에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이 욕망의 형태로 지속된다.

 

라캉은 정신분석은 상징계의 우월성에 입각해서 주체의 경험을 다루면서 상상계에 속한 자아가 아닌 진짜 주체를 드러내야 한다고 말한다. 상징계의 우월성이 다시 강조된다. 그러면서도 라캉은 정신병의 사례를 통해 상징화에 저항하는 실재를 고려해야 함을 동시에 강조한다.

실재계는 상징계가 좌초하는 곳으로 어떠한 지식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주체가 결여 형태로 체험하는 상징계의 구멍들은 실재계의 역설적 존재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욕망은 또 하나의 장애물이자 탈출구인 실재를 만난다.

 

상징계와 욕망의 관계가 조화가 아닌 긴장이며, 욕망은 이제 실재에 대한 갈망이 될 수밖에 없음이 보다 분명해진다.

 

상징계보다는 욕망의 최종 종착지인 죽음, 즉 상징계적 질서 너머로 가보려는 주이상스, 충동과 환상 대상a, 실재 개념 등에 방점이 찍힌다.

 

남근은 프로이트가 자주 혼용했던 실제 남성 성기인 페니스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남근이란 시니피앙과의 관계에서 주체가 위치하는 결여의 자리를 지시하는 기능을 하며, 어떤 대상에 의해서도 대리되지 않는 특권적 시니피앙이다. 라캉은 남근을 기표 중의 기표’, ‘중심 기표라고 부른다. 그러나 남근에서는 시니피앙의 작용 못지않게 결여의 의미가 중요한데 그것이 욕망의 지속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남근은 욕망의 대상은 상징계 속의 순수 결여라는 것을 숙명처럼 주체에게 각인시키는 거세의 기표이다. 남근은 자신의 현존을 통해서 상실 그 자체를 육화된 존재로 만드는 결여에 대한 기표이다.

 

결여의 자리를 지시하는 시니피앙 즉 남근이 바로 욕망이 자리잡는 곳이다.


욕망은 상징계의 대타자가 남근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남근을 향한다.


남근은 구체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결여를 지시하는 순수 형식으로서 작동한다.


남근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겪는 시기의 아이가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아이와 어머니의 욕망은 남근을 중심으로 순환되지만 아이는 남근이 될 수 없는데 그것은 상상계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등장은 남근이 상징계의 질서에 속한다는 것을 아이로 하여금 깨닫게 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상상적 의존에서 벗어나서 주체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때부터 상징계의 법으로 강요되는 아버지의 이름은 주체에게 남근의 의미와 내용으로 수용된다.


남근이야말로 결여로서 욕망을 강조하는 라캉의 로고스이자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이야말로 시니피앙과의 관계에서 주체의 역설적 자리를 사라짐과 나타남을 통해서 드러내는 행위이다.

 

언어는 주체를 상징계에서 의미로 출현시키면서 그 이면 효과로 주체 분열을 발생시키는데, 그 결과가 첫 번째 과정인 소외이다. 그러나 주체는 소외에 매몰되지 않고 분열 속에서 결여로 남게 되는 잃어버린 대상을 분리함으로써 자신을 주체로 생산하게 되는데 이것이 분리의 의미이다.

 

 

 

욕망이 언어의 장소인 대타자에 대한 관계에 의존하지만 대타자 역시 결여된 존재이기에 욕망은 최종적으로 만족의 불가능성에 직면한다. 여기서부터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죽음 충동이 주체를 엄습한다. 그러므로 욕망은 주이상스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상징계는 주체가 벗어날 수 없는 한계이며, 절대적 주이상스에 도달한다는 것은 말하는 주체에게는 불가능하다.




■ 시니피앙 논리


1. 라캉은 언어의 최소 단위를 기호가 아니라 시니피앙으로 보는데 시니피앙이 의식적, 무의식적 담론을 형성하고 주체를 발생시키는 근본 요소가 된다. 기호와 달리 시니피앙은 의미가 없는 순수 차이의 단위이며, 변별적 체계를 통해 상호 작용하는 것은 기호가 아니라 시니피앙들이다.

시니피앙은 주체를 초월해 있는 언어의 물질적 실재이다. 순수 차이인 시니피앙의 작용을 통해 의미의 세계인 상징계가 만들어지고 주체의 운명을 규정한다고 설명하는 것이 라캉 사유의 가장 큰 특징이다.

 

2. 시니피앙은 언제나 연쇄적인 사슬 형태로만 존재한다.

개별적인 시니피앙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서로 간의 변별적 체계 속에서 대립을 통해서만 가치를 부여받는다.

시니피앙의 연쇄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 작용 속에서 첨가되기도 하고 재결합되면서 의미를 지연시킨다. 한 시니피앙과 또 다른 시니피앙의 결합이 의미를 발생시키는데 또 다른 시니피앙 조합이 첨가될 때마다 의미는 바뀔 수 있다. 그 때문에 언어에서 시니피앙들의 대체와 연결 과정인 은유와 환유가 기본 법칙으로 중요해지는 것이다. 라캉은 시니피에가 의미화와 연관되지만 시니피앙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의미는 가변적이라고 말한다. 시니피에는 시니피앙 밑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들어가며 고정된 기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라캉이 강조하는 점이다.

 

3. 시니피앙은 주체를 대리함으로써 상징계를 완성하고 무의식적 욕망을 발생시킨다. 주체는 상징계의 주인이자 언어의 주관자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로 시니피앙이 주도권을 갖는다.

시니피앙은 또 다른 시니피앙을 위해 주체를 대리해서 표상하는데 우리가 통상 사유의 출발점에 놓는 주체가 사실은 시니피앙의 호명 효과에 불과하다는 게 라캉의 생각이다.

 


■ 상징계

 

실재계란 상징계를 넘어서는 절대적 질서이며, 상상계란 상징계에 지배를 받는 표상들의 질서이기 때문에 상징계가 둘의 기준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상징계는 주체의 원인이자 활동 무대가 되는 위상학적 공간을 말하며, 시니피앙의 연쇄적 결합과 상호 작용에 의해 구성된다. 상징계는 언어적인 영역에 속하지만 언어 자체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상상적 공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교환과 차이를 발생시키는 추상적 구조와 형식을 말한다.

 

상징계는 또한 끊임없는 반복의 구조이자 정신분석이 발견한 프로이트 이후의 진정한 로고스이다. 로고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사물의 존재와 운행을 규정하는 법칙이자 원리란 말이다. 상징계는 주체에 선행하며 주체의 바깥에 놓여 있는 선험적 질서로 이러한 것들이 무의식의 규정에서 중요하다.

라캉은 인간에 대한 상징계의 외재성으로부터 프로이트적인 무의식이 설명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무의식은 주체의 내밀한 욕망이나 억압된 표상과 기억의 공간이 아니라 주체에 작용하는 말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상징계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주체는 상징계의 주인이 아니라 상징계를 이루는 한 항에 불과하며 그때그때 시니피앙의 순환에 의해 주어진 역할을 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1. 상징계는 순수 형식이자 질료인 문자에 의해 구성된다.

라캉은 상징계에 대해 설명하면서 확실하고 고정된 의미를 가진 문자는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한다. 편지는 의미의 세계이기도 한 상징계가 순수 형식인 문자의 미끄러짐과 순환에 의해 구성됨을 잘 보여준다.

 

2. 편지는 상호 주체성의 구조 속에서 주체의 역할과 위상을 결정한다.

 

3. 문자는 반복되는 것이다. 반복은 상징계의 본성이기도 하다.

상징계는 그 구조에 채워질 수 없는 결여를 가지고 있는데 반복은 이 결여를 채우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유기체를 움직이는 쾌락원리가 바로 시니피앙의 연쇄라고 강조한다.

상징계가 반복을 특성으로 한다는 것은 죽음 충동이 상징계의 본질을 이룬다는 말이다. 죽음은 충족되지 않는 결여에 다름 아니고, 반복은 그것을 메우려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 시니피앙의 주체


시니피앙 논리는 주체가 언어의 효과라고 정의하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주체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시니피앙의 연쇄와 의미화의 지속을 위한 언어적 파생물이다. 라캉의 연산식 S/s는 시니피에에 대한 시니피앙의 지배를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주체는 시니피에 즉 의미의 대표자로 간주할 수 있다. 나중에 라캉은 상징계를 지탱하는 구조의 인격화된 지점을 대타자(Autre)라 칭한다. 대타자는 상상계에 속하는 타자와 달리 언어의 장소로 정의되며, 호명을 통하여 주체를 발생시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 주체, 즉 의미는 시니피앙에 의해 발생되기 때문에 라캉은 고정된 실체나 기원으로 가정된 데카르트적 주체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가 거울에 비친 모습과 동일시하면서 대상처럼 내세우는 자아와 주체를 구별해야한다. 자아가 상상계에 속한다면, 주체란 상징계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라캉이 말하는 주체는 외부 세계를 마주하고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고 대상들을 사유 속에서 취하는 코기토가 아니라, 상징계에 포섭됨으로써 불완전하게 존재하는 그런 주체이다.

 

라캉은 시니피앙에 의해 대리됨으로써 존재성을 얻게 되는 이 나약한 주체가 바로 데카르트가 찾고자 했던 주체이자 프로이트의 무의식 주체라고 선언한다.

하나의 시니피앙이 또 다른 시니피앙과 연쇄 사슬에서 결합할 때 의미의 담지자인 주체가 탄생하지만 그것은 존재론적 사유에서 본다면 고정된 자리가 없는 무에 가깝다. 이 주체는 시니피앙에 의존함으로써만 상징계 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잡는데 주체와 시니피앙의 관계가 정신분석이 겨냥하는 핵심 대상이라고 라캉은 강조한다.

 

시니피앙이 주체에 존재성을 부여해준다고 해서 주체를 한갓 이름이나 구별의 기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라캉이 욕망의 주체를 통해 강조하는 또 다른 의미를 놓치게 된다. 주체는 한편으로는 시니피앙에 의해 상징계 질서에 나타나면서도 동시에 그 시니피앙 밑으로 사라지는데 이 주체 소멸이 욕망의 진정한 원인이다.

 

1950년대 이후 라캉은 언어적 구별을 토대로 언표 주체언술 행위의 주체를 구분하면서 주체 분열의 논리를 정교하게 발전시킨다. 전자가 담론의 주체 혹은 자아에 가깝다면, 후자는 사라짐을 통해서만 존재를 드러내는 욕망의 주체를 말한다.

 

라캉은 무의식 주체가 위치하는 곳을 탈존혹은 외재적 자리라고 말한다.

 


■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주체


라캉은 오이디푸스를 상징계 작용과 연관시켜 추상적으로 개념화한다. 오이디푸스 과정이란 주체가 어머니의 욕망에 종속된 상상적 동일시에서 벗어나 아버지가 부과하는 상징계의 질서로 편입되는 과정이다.

라캉은 이를 다른 말로 부성 은유라고도 지칭하는데 주체가 아버지의 이름(Nom-du-père)’을 수용하고, 이 기표에 동일시함으로써 시니피앙의 주체로 탄생하는 과정이다.

 


■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세 단계

 

1. 상상적 동일시로 거울 속에 비친 타자적인 이미지를 아이가 자신의 것으로 수용함으로써 자아가 형성되는 단계이다. 상상계는 자아를 중심으로 자아의식에 수용되는 이미지들의 세계를 말한다.

 

2. 다음 단계는 상징계 질서를 대표하는 아버지의 기표에 동일시함으로써 주체가 형성되는 단계이다. 이것을 이차 동일시라고도 하며, 주체는 비로소 상징계에 자리를 잡는다.

 

이 모든 과정은 동일시에 의해 가능한데, 그 근원에는 자아상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도취가 있다.

 

두 단계의 동일시는 시간적인 선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몸담는 세계에서 상상계와 상징계로 계속해서 작용한다.

 

두 번째 동일시에 의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극복된다. 이때 동일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부모의 이마고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시니피앙이다.

 

3. 라캉에 의하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최종적으로 세 단계를 거쳐 해소된다.

마지막 과정은 부성 은유를 통해 상징적 동일시가 완수되면서 주체가 탄생하는 과정이다.

이때부터 욕망과 무의식은 주체의 본질이 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상상적 동일시 단계에서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를 매개시켜주는 것은 상상적 남근으로 이 단계에 벌써 남근을 둘러싼 갈등이 전개된다. 그러나 상상적 남근이란 실제로 아이가 도달할 수 없는 허구적인 것으로 아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표식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욕망은 아이가 아닌 아버지를 향해있는데, 이때 아버지는 남근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이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지 못하게 만들고 아이를 어머니에게서 분리시킴으로써 상상적 남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아이와 어머니의 결속을 깨뜨린다. 어머니와 아이의 욕망은 아버지에 의해 새롭게 질서가 부여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금지에 기초한다. 아이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욕망에 종속된 존재임을 보면서 자신이 어머니의 남근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데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거세의 원래적 의미이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세 번째 시기는 상징적 동일시를 통해 오이디푸스컴플렉스가 종결되는 순간이다. 이 과정은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란 시니피앙에 동일시를 함으로써 주체가 상징계에 안착하는 순간이다.

두 번째 시기가 상상적 아버지가 주도하는 시기라면, 세 번째 시기는 실재적 아버지가 등장하여 자신을 남근의 소유자로 내세운다.

이 세 번째 시기는 상상적 남근을 둘러싸고 아버지와 벌이는 아이의 경쟁의식이 끝을 맺고 상징계의 법이 주체에게 수용되면서 욕망하는 주체가 발생하는 과정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소유하는데 실제 남근을 가진 육체적 존재가 아니라 상징계의 대리자,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법의 대리자로 기능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최초 상징화 과정에서 아이의 욕망을 지배했던 어머니의 시니피앙을 대체하면서 주체를 상징계의 질서로 인도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성 은유이다.

 


■ 부성은유와 주체의 탄생


아버지의 이름은 일단 정착되면 주체가 그것에 근거해서 의미화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누빔점의 역할을 한다. 누빔점은 상징계에서 기표와 기의의 무한한 흐름을 멈추게 만드는 고정점에 대한 은유이다.

무의식은 부성 은유에서 비롯되는 원초적 억압으로부터 발생한다. 일단 부성 은유가 성공하면 최초 욕망은 환상의 형태로 상징계에 나타난다. 부성 은유에서 억압되면서 사라진 최초 기표, 어머니의 욕망은 주체가 되찾고 싶은 상실된 기표가 되면서 시니피앙 연쇄에 의해 절대로 메워지지 않는 영원한 구멍으로 남는다. 의미화 연쇄가 계속되는 것은 바로 이 빈자리를 채우려는 시도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왜 부성 은유가 욕망하는 주체를 낳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시니피앙의 대체로 주체는 존재성을 얻었지만 그것은 영원한 상실을 대가로 하기 때문이다. 상실은 사실 언어적 속성에서 비롯되는데 주체는 그것을 대상을 통해 채우려 하기에 욕망은 영원히 빗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초 모성적 시니피앙은 영원히 억압되면서 상징계를 벗어나며, 이 빈 공간에 욕망의 대상으로 놓이는 것이 바로 (Ding)이다. 물이란 영원히 상실된 대상처럼 주체에게 다가오는 형상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재를 물화하는 것이 승화임 -> 주체에게 다가오는 무엇을 물의 지위로 승격시키고 이것을 대상화시켜서 표출 -> 예술)

 


■ 은유와 환유


주체는 은유에 의해 구성되며, 욕망은 환유에 의해 지속된다.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적인 구조이며, 언어라는 것은 시니피앙의 연쇄에 의해 유지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시니피앙의 연쇄는 먼저 은유에 의해 가능해진다. 주체가 발생하는 것도 부성 은유에 의해 가능해지는데, 주체야말로 존재에 대한 시니피앙의 대체에 의해 가능해진다.

 

욕망의 출발점도 은유에서 찾을 수 있다. 언어 이전에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고 어떠한 구별도 없기에 욕망도 없다. 이 카오스적 혼란에 차이와 구별을 도입하는 것이 바로 언어이며, 사물을 기호로 대체하여 상징적 질서에 기입하면서 인간은 비로소 의미의 세계를 만든다.

 

은유란 시니피앙 간의 대체를 통해 전혀 새로운 의미(s)를 발생시키는 작용이다. 원래 시니피에가 시니피앙에 결합하려고 할 때 의미화를 가로막는 저항이 발생하는데 은유는 저항을 뛰어넘어 새로운 의미 창출의 효과를 가능하게 만든다.

 

라캉은 이것을 통해 의미는 고정된 게 아니라 시니피앙 밑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고 설명한다. 무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시니피앙들이 고정된 의미를 발생시킨다면 무의식이란 있을 수 없다. 의미화의 연쇄는 이렇듯 은유작용에 의해 출발하며 의미는 가변적이기에 그것을 좇는 욕망이 발생할 수 잇는 것이다.

 

은유와 달리 환유는 점선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하나의 시니피앙이 연쇄적인 사슬 속에서 또 다른 시니피앙에 연결된다는 뜻이다. 라캉은 환유에 있어 인접성의 관계를 전혀 중시하지 않는데 환유라는 것은 의미가 배제된 시니피앙 간의 연결이기 때문이다. 은유와 달리 환유의 효과는 의미화 창출에 실패한다. 연결을 통해서는 의미화를 가로지르는 장벽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환유의 의의는 의미화보다는 언어를 지속시키는 연결 자체이기에 라캉은 욕망을 환유로 설명한다. 욕망이란 하나의 대상에서 또 다른 대상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환유적 속성을 갖는다. 욕망이란 늘 어떤 다른 대상에 대한 욕망으로 그것은 사실상 현실 세계에 없는 불가능한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다.

 

욕망이 겨냥하는 자리는 어떤 대상에 의해서도 채워질 수 없고, 언어는 늘 그것을 제대로 지시할 수 없는 본질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가 시니피앙에 의해 대리되면서 상징계에 출현하는 것은 원초적 상실을 대가로 해서 이루어지기에 욕망이 겨냥하는 것은 바로 이 존재 결여이다. “욕망이란 존재 결여의 환유이다.”

 

존재란 언제나 상징적 질서에서 무()로 남는 것인데 주체는 대타자의 시니피앙에 의존하면서 결여를 메울 수 있는 대상을 찾으려고 한다. 대타자가 욕망하는 미지의 x가 바로 주체가 소망하는 대상으로 주체는 환유적 운동을 통해 그것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어긋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환유적 운동은 끊임없는 미끄러짐 속에서 역설적으로 주체의 진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 진리란 상징계에서 소외되고 배제되면서 의미화를 거부하는 주체의 진정한 자리인 무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관련 자료 : 정신분석학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크 라캉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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