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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정리] 프리드리히 니체 / 『도덕의 계보』/ 청하 / 세 번째 에세이: 금욕주의적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by Radimin_ 2016.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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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에세이 · 금욕주의적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 번째 에세이에서 니체는 앞의 두 에세이에서 파헤쳤던 <선과 악>, <우와 열>, 그리고 <>, <양심의 책>에 깊이 관여되어있는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해 분석한다.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니체에 의하면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원한에 사로잡힌 약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무()의지 상태를 두려워하여 만들어낸 이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의지 보다는 차라리 허무한 의지를 의욕하는 형식이다. 허무한 의지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삶의 본능들을 <나쁜 것>, 또는 더 나아가 <>으로 돌림으로써 그것들을 자신의 삶 속에서 축출해내고, 이러한 축출을 통해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상태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고 자위하는 일종의 환상에 대한 의욕이다. 자연스러운 인간 본능의 억압, 즉 금욕은 한 인간이 자연스러운 본능에 끌릴 때마다 그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체벌을 가하게끔 만들고, 이를 통해 존재하지도 않는 공허한 이상에 접근하게끔 한다. 하지만 이 공허한 이상은 말 그대로 공허이고 허무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이 갖고 있는 금욕주의적 이상은 필연적으로 허무주의를 배태하고 있다는 것이다.

 

 

■ 철학자들의 금욕주의

 

그에 의하면 철학자들은 성직자들 못지않게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들은 흔히 그들이 추구하는 고매한 정신과 진리에 대한 탐구활동에 대하여 인간의 자연적인 삶의 본능을 방해물처럼 여기곤 한다. 그들은 흔히 성욕을 혐오하고, 자연스럽게 결혼 또한 기피한다. 그들은 세상의 소음과 명성, 정숙하지 않은 것들, 저속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을 혐오한다.

 

이러한 철학자들의 혐오는 금욕주의적 이상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의 금욕주의적 삶의 태도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인데, 니체에 따르면 그들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삶의 목적을 갖고 있다.

 

철학자에게 있어서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략) 철학자들은 금욕주의적 이상 속에서 가장 높고 대담한 정신을 추구할 수 있는 최적상태를 바라보면서 웃음짓는 것이다그는 <생존>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 속에서 그의 생존을, 그의 생존만을 확신한다. 그리고 아마도 불경스러운 바람, <세상은 망하더라도 그의 철학과 철학자인 나는 살아 남으리라!>라는 생각을 품을 정도로 생존을 확신하는 것이다.”[각주:1]

 

이와 같이 철학자들이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이상, 그들은 금욕주의적 이상의 가치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재판관이 될 수 없다.

 

니체는 철학자들의 금욕주의를 <사막>에 비유하며 비판한다.

아마도 자발적인 무명(無名), 자기 자신의 도피, 소음이나 명예, 신문, 그리고 영향에 대한 혐오, 정숙한 일, 일상적인 일, 드러내놓기 보다는 감추려는 것, 그것을 보고 있다는 것이 청량제가 될 수 있는 무해하고 쾌활한 짐승이나 새들과 빈번한 교제를 이루는 것, 친구로서 산에 접하는 것, 그러나 죽어 있는 산이 아니라, 눈을 가지고 있는 산을(말하자면, 호수가 함께 있는) 친구로 하는 것, 틀림없이 서로 간에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면서 어느 누구하고도 무사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완전히 평범한 호텔 안의 방 한 칸그것이 바로 여기에서의 <사막>이 의미하는 것이다.”[각주:2]

 

 

■ 금욕주의적 생활의 자기모순성

 

금욕주의적 이상을 지닌 성직자들은 어느 특정 문화, 특정 종족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느 문화에서든, 어느 종족에서든 서로 다른 형태로, 그러나 같은 금욕주의적 이상을 품고 등장한다. 그들의 이러한 생존력과 번식성은 니체에게 있어서 상당히 흥미로운 일로 다가왔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본능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번식을 금지하고 있다. 대지 위의 삶에서의 소멸을 통해 피안으로 향하고자하는 그들의 사상은 필연적으로 삶에 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욕주의적 생활은 자기부정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삶에 반하고 자연에 반하는 의지를 수반한다. 따라서 그것은 삶의 본능이 자리잡고있는 가장 확실한 영역자아, 육체, 자신의 실재성을 공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점점 인류의 정신 속에서 점점 번성한다.

 

니체는 여기에 금욕주의적 생활의 모순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명목상 피안을 지향하지만 사실 그 심층엔 오히려 원한에 근거한 모든 삶의 지배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원한에 기반한 권력에의 의지가 금욕주의적 이상과 생활 속에 존재하면서 그들을 오히려 속세 안에서 번성하게 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외면적으로는 점차 인류 안에 번성하면서, 인류의 내면 안에서는 자기멸시, 자아상실, 자기희생, 자기체벌 등과 같은 허무적 의지를 심어놓는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지극히 역설적인 것이다. 즉 우리는 불일치되기를 바라는, 고통 속에서 그 자체를 향락하려는, 그리고 심지어는 그것 본래의 전제 조건인 삶을 위한 생리적 능력이 감퇴하면 할수록 더욱더 자신만만해 하고 의기양양해 하는 불일치 앞에 서 있는 것이다.”[각주:3]

 

철학자들이 금욕주의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것, <순수한 이성>, <절대적인 정신>, <인식 그 자체>라는 개념에서 철학자들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모순을 꼬집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순수하고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정신들은 어떤 방향에도 치우치지 않은 인식의 눈을 지녀야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이미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한 애정과 편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미 그것으로 향한 문은 닫혀버렸다. 게다가 인간 그 자체가 삶의 본능을 지닌 생명인 이상 이러한 무기물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 니체는 어떤 절대적인 진리, 순수, 객관과 형이상학적 관념과 이상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금욕주의적 의지가 이미 스스로 그 내부에 발전의 불가능성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인간에게 <순수한 이성> 등의 순수관념들을 이상으로서 인간에게 강요한다. 도달 불가능한 이런 순수관념과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자연성과 생명성을 부정하고 생명의 활력으로부터 오는 지성을 스스로 거세하게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감정을 배제하고 자연성을 억누르고 욕망을 잠재운 뒤 가장 깨끗한 눈으로 <인식 그 자체>를 행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명의 본질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금욕주의적 이상과 이에 따르는 생활방식은 생명성의 부정, 삶의 부정에 다름 아니다. 이를 니체는 <삶에 대해 투쟁하는 삶>이라고 부른다.

 

 

■ 니체가 바라본 금욕주의적 이상의 실체

 

위의 분석을 통해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의 실체에 대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사실 이상 그 자체로서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 그 이상을 내세워 원한의 인간이 자신의 원한을 근거로 활기 없고 자기부정을 일삼는 삶의 형태를 퍼뜨리고자 하는, 원한에 기반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책략인 것이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질투와 시기, 원한에 휩싸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다르게 되고 싶은, 다른 곳에 있는 육신을 갖고자 하는 갈망이며, 이 갈망의 두드러진 열렬함이며 열정인 것이다.”[각주:4]

 

 

■ <최후의 의지>, ()에의 의지, 허무주의에 대한 경계

 

금욕주의적 이상이 인류 안에 번성하게 되면 인간 안에서 인간에 대한 공포가 감소한다. 인간이 지니고 있던 활기, 이에 수반되는 잔인성, 모험성과 대담함이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억눌리고, 이에 비례하여 인류는 활기를 가진 인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 안에선 서로에 대한, 그리고 자신에 대한 동정이 널리 퍼지게 된다. 활기를 잃은 인간들은 스스로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과 비슷하게 평균화되어버린 다른 인간들에 대하여 동정한다. 이 동정 속에서 그들은 안락을 찾는 듯 싶지만, 생명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에 대한 활기를 잃어버리고 허무에 빠져버린다.

 

그들은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일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없구나, 나는 나 자신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제 나는 나 자신에 진저리가 나는구나!>하고 탄식한다.”[각주:5]

 

니체에 따르면 인간에 대한 공포는 그 부정적 뉘앙스와는 달리 오히려 건전한 인간의 유형을 존속시킨다. 이 공포야말로 인간에게 강함, 활기를 고양시키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공포가 아닌 동정만이 통용되는 순간, 인간의 내면 속엔 그들과 비슷한 평균적인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함께, 승리자에 대한 원한과 혐오, 증오가 싹트게 된다. 그리고 이 원한과 증오는 인간을 더욱 자기부정으로 이끈다. 더불어 자기부정은 더욱 큰 원한과 증오로 되돌아오며 자기부정과 원한의 악순환을 형성하는 것이다.

 

■ 원한의 인간에 대한 성직자적 치료법

 

성직자들은 고통받고 있는 원한의 인간에 대하여 금욕주의에 기반한 성직자적 치료를 행한다.

 

고통을 받는 자는 전부 고통스런 감정의 원인을 발견하는 데 무서울 정도로 열중하며 독창적이다. 그들은 의심하기를 즐기며, 불쾌한 행동과 상상의 모욕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은 그들에게 괴로운 의심 속에서 한껏 즐기며, 그들 자신을 그들이 지닌 악의가 가지고 있는 독으로써 매혹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는 모호하고 의심스러운 사건을 찾기 위해서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내장(內臟)을 샅샅이 파헤친다. 그들은 그들의 아주 오래 전의 상처를 찢어서 열고, 아주 오래 전에 치유된 상처에서 피를 흘린다. 그들은 그들의 친구들이나 아내, 자식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면 어느 누구도 악인으로 만든다. 나는 괴롭다! 누군가 이것에 대해 비난을 면치 못하리라.」ㅡ모든 병든 양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목자인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그에게 말한다. 그렇다. 나의 양이여! 누군가 그 사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러나 너, 너 자신이 바로 그 누구에 해당하며, 너만이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너만이 너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ㅡ이것은 뻔뻔스럽고 아주 잘못된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는 이것에 의해 달성되었다. 즉 원한의 방향이 전환된 것이다.”[각주:6]

 

이러한 성직자적 치료법은 원한의 방향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게 함으로써 그들을 무해하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을 스스로 자멸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들의 치료법은 원한의 인간이 담지하고 있는 원한 그 자체를 없애는 것에는 무관심했다. 성직자들은 원한의 인간이 겪는 원한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경감시킨다. 그 고통의 원인을 자기 자신이라고 분명하게 설정해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곧 더 큰 고통을 수반한다. 자기 자신이 고통의 원인이라면 그 원인을 없애는 것이 궁극적으로 고통을 없애는 것이 되는데, 이 경우 그는 자기 자신을 소멸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소멸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 성직자적 치료법은 단지 고통 그 자체와 (영원히)싸울 뿐, 고통의 근본적 원인이나 진정한 병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 성직자적 치료법의 첫 번째 예시 : 기계적인 활동

 

이러한 성직자적 치료법과 최면술 중에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기계적인 활동이 있다. 이것은 고통받는 자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으로서 기계적인 활동에 고통받는 자의 활동성을 결부시키는 것이다.

 

절대적인 규칙성, 꼼꼼하면서도 생각이 없는 복종, 단호하게 고정된 생활양식, 완전히 짜여진 시간, <비인격성>이나 자기망각, 자기무시를 위한 어떤 허가, 그뿐 아니라 그것을 위한 훈련과 같은 것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얼마나 철저하게 얼마나 미묘하게 고통에 대한 투쟁에서 이것을 사용할 줄 알았던가?”[각주:7]

 

■ 성직자적 치료법의 두 번째 예시 : 이웃에 대한 사랑

 

보다 더 고귀한 수단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은 고통 받는 자에게 <약간의 우월성>을 가미해 줌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경감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고귀한 이웃사랑과 이의 실천은 고통받는 자로 하여금 이웃에 대한 약간의 우월성을 제공한다. 이것은 행복을 금지당한 자기혐오적 인간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성직자적 치료법이 안고있는 한계와 같이 고통의 근본에 대한 치료를 결여하고 있다.

 

이웃에 대한 사랑도 고통받는 자들이 조언을 잘 받을 때는, 그들이 널리 사용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당연히 똑같은 근본적인 본능에 사로잡혀 서로서로를 헐뜯으리라.”[각주:8]

 

 

■ 성직자적 치료법의 세 번째 예시 : <공동체>의 의지

 

무리를 형성하는 것은 고통받는 자의 의기소침에 대하여 좋은 대책이 된다. <공동체>의 의지는 고통받는 자로 하여금 그의 불만이나 스스로에 대한 반감 등의 개인적인 요소로부터 그를 초탈하게 한다. 그들은 무리에 복종하고 따름으로써 그들의 나약함과 불쾌함을 떨쳐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부정의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공동체에 깊이 젖어듦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을 망각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의 개별성, 그의 자아가 그로부터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망각은 필연적으로 자아의 고통을 수반하므로 이 또한 고통받는 자에 대하여 근본적인 치료법이 될 수 없다.

 

이상의 예시에서 볼 수 있듯이, 성직자적 치료법은 그 근본적인 출발부터가 고통의 원인을 타깃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기반한 어떠한 구체적 치료책도 고통에 대한 미봉책에 그칠 수밖에 없다.

 

 

■ 세 편의 에세이에 대한 니체의 총체적 종합과 진단

 

이에 대해서는 그의 마지막 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정리를 갈음하고자 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을 제외하고는 인간, 인간이라는 동물은 이제까지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그의 생존은 어떠한 목적도 품지 못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생존하는가?>라는 물음은 대답이 없는 물음이다. 인간과 대지(大地)를 위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 모든 커다란 인간의 운명의 배후에는, 더 커다랗게 <헛되다>라는 후렴이 울리고 있다. 이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이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 인간은 무서운 공허가 인간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인간은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고, 설명하고, 긍정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인간은 자기 생존의 의미 문제로 괴로워했다. 인간은 주로 하나의 병든 동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다. <나는 왜 괴로워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없다는 것이 진정한 문제였다.

인간, 이 가장 용감하고 괴로움에 익숙한 동물은 괴로움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아니 괴로움의 의미, 괴로움의 목적이 제시된다면, 인간은 괴로움을 바라고 괴로움을 찾기까지 한다. 괴로움 그 자체가 아니라, 괴로움에 대한 무의미성이 바로 이제까지 인류에 내린 저주였다그런데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간에 하나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주어진 유일한 의미였다.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괴로움은 해석되었으며. 가공할 공허가 채워졌던 것처럼 보였다. 모든 자살적 허무주의에 대해서 대문이 닫혀졌다. 그러나 이 해석은 의심할 여지없이 새로운 괴로움을 가져왔다. 그것은 보다 깊은, 보다 내면적인, 보다 유독한, 보다 삶을 좀먹는 괴로움이었다. 이 금욕주의적 이상은 죄라는 관점에서 모든 괴로움을 해석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에 의해서 구해졌고,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이제 더 이상 바람에 휘날리는 가련한 나뭇잎이 아니었으며, 무의미의 놀잇감이 아니었다이제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지하게 되었다. 어디를 향해서, 무엇 때문에, 무엇을 의욕했던가는 아무래도 좋다. 그 의지 자체가 구원되었던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방향이 정해진 저 모든 의지가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를 은폐할 수 없다.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는 더 한층의 증오, 이성과 관능에 대한 공포, 행복과 미에 대한 공포, 모든 가상(假象)과 변화와, 생성과, 죽음과, 원망과, 욕망 그 자체로부터 도망치려는 원망(願望),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감히 시도해 본다면허무에의 의지이며, 삶에 대한 혐오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의지이며 의지로서 남아 있다!……그래서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으로 말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허무를 의지한다.“[각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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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116 [본문으로]
  2.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117 [본문으로]
  3.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127 [본문으로]
  4.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129 [본문으로]
  5.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131 [본문으로]
  6.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137 [본문으로]
  7.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143 [본문으로]
  8.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144 [본문으로]
  9.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169-17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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