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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도서 리뷰 정리] 프란츠 카프카 /『변신』/ 문예출판사

by Radimin_ 2016.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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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소설 『변신』[각주:1]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신해버린 젊은 남자 그레고르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벌레로의 변신'이라는 비현실적인 요소를 담고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두고 벌어지는 인간사의 변화와 갈등에 대해선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사르트르에 의해 발굴되었다고 하는 프란츠 카프카. 그의 작가적 면모는 사르트르와의 인연처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도 맥이 닿아 있다. 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던 헌신적인 남자 그레고르가 갑자기 인간에서 벌레로 변신해버린 뒤, 그의 실존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사건을 마주하게된 그의 가족들은 그의 실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소설에는 특히 현대사회에서의 인간의 사회적 위치와 관습, 그리고 인간 실존과의 관계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이 담겨있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떠오르게되는 문제의식이 있다. 과연 실존인가 껍데기인가. 


'실존'이란 말을 표현하거나 정의내리긴 쉽지 않다. 실존이란 언어로 잡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 또한 하나의 언어적 표현이기 때문에 자신을 '김XX입니다.'라고 정의내리는 것은 그 사람의 실존을 표현한 것이 될 수 없다. 언어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망이며, 이름은 이러한 의미망을 통해 그 사람의 '실존 외부에서' 주변인들이 그에게 부여한 사회적 명칭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름뿐만 아니라 '나는 XX입니다' 라는 형식을 가진 모든 언어적 표현 또한 결국은 그의 실존을 비켜간다('나는 인간입니다.'또한 마찬가지이다). 실존이란 것은 오히려 언어 외부에서 감지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존을 굳이 표현한다면, 그 사람의 주체성, 고유성, 자유의지, 그리고 자신이 이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사람에게 다가오는 어떤 존재감.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실존과 더불어 타인의 실존을 인지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이러한 자아와 타인에 대한 실존적 인식이 가능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관념속에 뿌리내린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나 문화적 관습 등을 벗어나 진정 주체성과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주체적 자아와 세계가 소통하게 되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는 것이 실존주의의 간단한 맥락이다.


이 소설에선 실존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접근이 가능하리라 본다.


하나는 그레고르 스스로의 실존.

또 하나는 가족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그레고르. 



■ 그레고르 스스로의 실존


이 소설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벌레로 변신하고 난 뒤에 벌어지는 그레고르의 심리이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육체가 벌레가 되어버린 것에 대해 처음에는 믿지 못한다. 그러나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뒤에는 걱정과 공포가 그를 엄습해온다. 그레고르에게 있어서 자신이 벌레로 변신했다는 것은 본인 스스로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변신에 대해서 그가 느끼는 중대성의 의미는 뭔가 이상하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인간이 아닌 벌레가 되어버렸다는 의미보다도, 이로 인해 자신이 직장에서 입게될 피해와 가족들을 부양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걱정의 의미가 더 컸던 것이다. 


그레고르가 받아들인 변신의 의미는 자기 자신 그 자체의 변신이라기보다는 그가 속한 가정 내에서 그의 위치, 그리고 그가 맡았던 '기능'에 대한 변신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는 벌레로 변신한 뒤에야 비로소 자기의 실존에 대한 희미한 그림자를 쫒기 시작한다. 그가 변신한 이후 그를 돌보던 누이동생은 그의 방에서 가구들을 치워버리려고 한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에겐 더이상 인간일 때 사용하던 가구들은 아무 소용도 없었고 도리어 그가 방안을 돌아다니는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레고르 또한 방 안의 가구들 때문에 자신의 움직임이 제약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누이동생의 이러한 처신은 분명 그레고르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레고르는 자신의 방에서 가구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더이상 인간이 아니라 벌레에 불과하며, 더욱이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의 표지임을 알아차린다. 어렸을 적부터 사용하던 책상에 대하여 인간이었을 때의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레고르는 방 안에 걸려있던 그림 하나라도 지켜내려고 필사적인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이러한 그레고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스스로의 실존을 직시하는 데는 실패한다. 그는 끝내 스스로의 주체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지쳐버린 가족들의 '사망선고'를 받자마자 그날 밤에 숨을 거둔다.


그의 가족들은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에 대하여 더이상 가족으로 받아들이길 포기하고 그를 한낱 벌레로 낙인 찍고는 그에게서 그의 이름을 빼앗아버린다. 가족들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며 살아왔던 그레고르에게, 가족들로부터의 추방은 그에 대한 '사망선고'와 다르지 않았다.



■ 가족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그레고르


한편 가족들은 그레고르에 대하여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하자. 가족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동안 그레고르의 모습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다. 오직 누이동생만이 그레고르의 음식을 챙겨주고 방을 정리해주며 그레고르를 챙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누이동생의 행동에 여러 특이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소설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누이동생은 그레고르를 보살피는 일에 대하여 어떤 특권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 특권의식이란 자신만의 일, 자신이 관장하고 통제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자존감을 의미한다. 누이동생은 그레고르를 돌봐주는 일을 지속하면서 가족 내에서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의식에 눈을 뜨게되고, 이를 통해 '가족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특권의식에 눈을 뜬 누이동생은, 점차 그레고르를 돌보는 일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과 기호를 투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일은 그레고르를 돌보는 일에서 점차 멀어지고 자신만의 일을 지키는 것으로 점차 방향을 옮겨간다. 이 과정에서 그레고르는 누이동생에게 있어 더이상 오빠가 아니라, 특권의식에 결부된 '일거리'가 되어버린다. 


한편 그레고르의 아버지는 이 사건 이후 노쇠한 가장의 모습을 벗어나 직장을 가진 건강한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이제 경제적 가장으로서의 그레고르가 없는 상황에서 그레고르가 맡고 있던 자리에 그의 아버지가 대신 서게 된다. 그리고는 그레고르에 대하여 어떤 반감을 내비치면서 그레고르에게 사과를 집어던지는 지경에 이르른다. 이때 던진 사과가 그레고르의 등에 박히고 그레고르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된다. 그레고르는 과거 파산한 자신과 가족들을 먹여살리던 든든한 맏아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도리어 벌레가 되어버린 자신의 아들에게 치명상을 가하는 그의 아버지의 모습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그레고르의 변신으로 변한 것은 '맏아들'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벌레로 변하고 경제적 기능을 상실했을지언정 그레고르는 여전히 그의 피를 나눈 자식이다. 그레고르가 여전히 자신의 아들이라는 변함없는 사실이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에게서 그레고르는 그레고르 그 자체가 아닌 하나의 '경제적 기능'이었다.  


그레고르의 어머니는 그레고르의 겉모습을 보고 가장 충격을 받는 인물이다. 물론 자신의 자식이 추악한 벌레가 되어버린 현실에 충격받지 않는 어머니는 없다. 누이동생이 그레고르의 방안에서 그가 쓰던 가구를 빼내고자 하는 순간에도 그의 어머니는 혹시나 그레고르가 받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걱정하는 등 자식에 대한 사랑을 놓치 않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의 어머니도 후에 그레고르를 가족 구성원에서 추방하는 과정에 암묵적으로 동조한다. 그레고르의 변신 이후 그의 아버지와 누이동생이 그레고르의 모습에 차차 적응해가는 동안에도 그의 어머니는 그레고리의 겉모습에 혐오와 공포를 감추지 못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레고리의 겉모습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레고리의 실존을 외면한 채 결국 그레고리를 완전한 벌레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나 싶다.



■ 결론 및 종합


그레고르의 죽음 이후 그의 가족들은 '희망'을 본다. 가족에게 공포와 절망, 혼돈의 대상이었던 그레고르의 죽음은 그들을 급속도로 안정화 시킨다. 그들은 벌레 그레고르가 살아있었던 날들보다 더욱 평안한 삶, 좀 더 나은 경제적 여건, 좀 더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그들을 비추는 희망의 햇살을 끝으로 이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자, 절망은 사라지고 희망이 승리했는가?


이 이야기 끝에 남겨진 알 수 없는 찝찝함과 허무함은 무엇인가?


그레고르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왜 그는 그렇게 죽어야했나. 어째서 그는 벌레가 되어야했나. 이러한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왜 그는 가족들에게 불행이 되고 끝내 잊혀져야했으며, 왜 그의 죽음이 가족들의 희망이 되어야했는가?>


이 소설의 결말은 한 가족의 희망으로 끝나지만, 실존의 입장에선 절망이며 비극이다. 그레고르는 아무런 이유 없이 벌레가 되어버렸다. 이 이유없는 변신으로 인해 그의 실존은 본인에게는 물론이고 그가 먹여살리던 가족에게까지 버림받았다. 이 이유없음이 오히려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레고르가 차라리 큰 죄를 지었다면 가족으로부터의 버림도 깔끔하게 납득이 갈텐데, 이 밑도 끝도 없는 이유없음의 결과가 가장 비참한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만약 나, 우리, 그리고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 이러한 이유없음에 휘말려 스스로의 실존을 잃어버리고 무능력상태에 빠진다면 우리는 그레고르의 가족과 똑같이 그를 철저히 버리고 망각해버릴 것인가? 


그리고 우리 자신이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어떨까? 


책을 다 읽고 이런 생각들을 하는 도중, 나는 갑자기 그레고르의 얼굴들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듯 했다.



  1. 프란츠 카프카, 이덕형 역, 『변신』, 문예출판사, (200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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