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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정리] 프리드리히 니체 / 『도덕의 계보』/ 청하 / 두 번째 에세이 《죄》《양심의 가책》 및 기타

by Radimin_ 2016.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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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정리] 프리드리히 니체 / 『도덕의 계보』/ 청하 / 세 번째 에세이: 금욕주의적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번째 에세이 · , 양심의 가책및 기타 



니체는 이 두 번째 에세이에서 양심과 죄의식에 관한 탐구를 진행한다. 그가 보기에 양심과 죄의식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활기와 의지를 억제하고 자기혐오로 나아가게 하는 노예도덕의 소산이었다. 그는 먼저 양심의 기원과 그것의 발달 과정을 추적한다.

 

 

■ 양심의 기원 : 약속, 책임, 그리고 양심

 

니체에 따르면 양심이란 약속과 이에 대한 책임의식으로부터 기원한다. 인간은 생물에게 주어져 있는 건망이라는 기억의 상실에 대항하면서 어떤 행위를 계속할 것이라는 자유의지로서의 약속을 발명해냈다. 모든 동물 중 유일하게 약속의 능력을 획득한 인간은 약속이라는 행위를 하기 위해서 스스로가 산출할 수 있는, 규칙적인, 필연적인 존재가 되었다. 만약 이러한 점이 결여되어 있으면 인간은 결코 약속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약속에 의해 자신의 행위가 미래에 산출되지 않으면 약속은 의미가 없다. 또한 스스로가 규칙적이지 않으면 약속의 이행을 보증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필연적이지 않으면 약속은 우연성에 빠져 길을 잃는다.

 

따라서 인간은 약속과 더불어 책임이라는 관념을 발명해낸다.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의지의 표현이 되었다. 약속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와 그로인한 산출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며, 책임을 진다는 것은 약속의 이행에 대한 자신의 힘을 보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약속과 책임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인식에 다다랐으며 이것은 점차 약속에 대한 책임감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간의 내면에 등장하게 된 양심의 기원이다.

 

 

■ 양심을 각인하는 기억의 형성

 

약속과 책임, 그리고 양심이 인간의 내면에 작용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인간에게는 기억이 필요하게 되었다. 약속에 대한 책임감으로서의 양심이 내면에 각인되기 위해서는 먼저 약속하는 인간이 이것에 대해 기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구성원에게 기억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구성원 각각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인간이 기억에 남겨둔 것이 나쁘면 나쁠수록, 인간의 관습은 그만큼 더욱 무서운 모습을 드러내왔다. 특히, 형법의 준엄성은 인간이 건망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회적 공동생활의 몇몇 원시적 요건을 순간적인 감정과 욕망의 노예인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던가를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척도이다.”[각주:1]

 

“(잔혹한 형벌의) 가지각색의 광경이나 전례를 보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마침내, 사회생활의 편익을 누리기 위해서 대여섯 가지의 <나는 그것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고 기억에다 새기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사실, 이와 같은 기억의 덕택으로 사람들은 마침내 <이성>에 도달한 것이다. 아아, 이성, 진지함, 감정의 통제, 숙고(熟考)라고 불리는 모든 음울한 일, 인간의 모든 이러한 특권과 사치, 이들에 대해서 얼마나 값비싼 대가가 치러졌던가! 모든 <좋은 것들>의 근저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잔혹함이 있었던가!”[각주:2]

 

 

■ 형벌은 채무법에 입각한 일종의 보복이었다

 

이렇듯 효과적인 기억술인 형벌은 개인의 약속에 대한 책임의 이행을 담보하기 위하여 도입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착각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 있다. 책임이나 죄는 형벌이 가해지는 명목상의 목적일 뿐, 이보다 더 근본적인 목적은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분노 해소에 있다는 점이다. 죄 또한 어떤 선험적인 <>이라기보다는 가해자의 피해자에 대한 <부채> 개념에 가까웠다. 어떤 행위가 죄인 이유는 그것이 약속 불이행이라는 <>한 행위여서라기보다, 그것이 피해자에게 분노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인류역사의 오랜 기간을 통해서 악행자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유로 형벌을 가하는 일은 없었으며, 따라서 유죄자만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서 형벌을 가한 적도 없었다오히려, 형벌은 오늘날에도 어버이가 자식을 벌주는 것과 같이, 가해자에 대해서 나타내는 피해자의 분노에서 가해졌던 것이다.”[각주:3]

 

약속이란 바로 이러한 등가적 계약관계로부터 발생했으며, 약속자에게 그 약속과 책임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약속을 통해 무엇인가를 저당잡히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모든 종류의 모욕과 고문을 가할 수 있었으며, 이는 부채의 액수에 상당한 만큼의 보복으로서 가해졌다.

 

그리하여 <>,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과 같은 도덕적인 개념의 세계는 바로 이 영역에서, 즉 채무법(債務法)의 영역에서 생겨난 것이다.”[각주:4]

 

 

■ 양심의 기저에 존재했던 잔혹성

 

따라서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성직자의 도덕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형이상학적 <선과 악>에 대한 감각이 아니라, 지극히 물질적이고 계약적인 채무와 보복의 관계로부터 기안한 것이다. 그리고 이 양심을 각인 시킨 것은 형벌이라고 하는 잔혹한 기억술이었다.

 

이 지점에서 성직자들이 이야기하는 <선과 악>의 선험성은 니체에 의해 부정된다. 더 나아가 니체는 이 양심의 기저에 깃들어있던 잔혹성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나는, 인류가 그 잔인성을 아직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시대가 염세주의자들이 존재하는 현재보다도 지상에서의 생활은 더욱 명랑하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각주:5]

 

니체에 의하면 인간의 잔인성이 외부로 발산되고 그것을 축제의 한 요소로서 받아들였던 시대에는 잔인성으로 인한 괴로움이 있었을지언정 인간은 활기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성직자의 도덕이 부상하여 인간이 그 잔인성을 자기 내면으로 향하게 했을 때 인간이 느끼게 된 자기멸시, 자아부정이 인간을 허무주의로 이끌고 인간으로 하여금 명랑성을 잃게 만들었다는 것이 니체가 진단한 현실이었다.

 

 

■ 공동체에서의 형벌의 변천과정 : 형벌과 정의의 채무관계 성질의 증명

 

니체는 공동체에서 행해졌던 형벌의 양상이 변천하는 것을 추적함으로써, 형벌이 선험적인 <>의 관념이나 <선과 악>이라는 관념에 기반한 단죄가 아님을 증명한다.

 

초기단계에서 공동체는 채권자, 구성원은 채무자의 성질을 갖고 있었다. 구성원들은 공동체 바깥에서 자신이 직면하게 될 위협을 인지하고 보호와 돌봄을 대가로 공동체에 자신을 저당잡혔다. 여기서 어떤 구성원이 공동체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행했을 경우, 이 구성원이 피해자 개인에게 가한 피해는 사실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이보다 더 중대하게 고려되었던 문제는 이 구성원이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힘으로써 공동체와의 계약을 파기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공동체는 구성원에 대한 채권자의 지위를 가지고 채무자인 이 범죄자에 대해 공동체의 분노에 상응하는 보복을 가한다. 그리고 이 보복이란 공동체가 이 범죄자에게 제공했던 모든 혜택을 박탈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보호를 철회하고 공동체 외부의 야만적인 상태 속으로 추방하는 것이다.

 

이는 그 범죄자가 추방령에 의해 조르주 아감벤의 개념인 호모 사케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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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동체의 규모와 권력이 커짐에 따라 공동체의 구성원에 대한 보복은 점차 완화되어간다. 공동체의 권력이 강해질수록 개개인의 영향력이 현저히 약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법은 점차 그 범죄자를 공동체의 법적 테두리 안에서 보호하는 양상으로 변화해간다. , 공동체는 더 이상 범죄자 개인에게 개인적인 분노를 추방과 같은 극단적인 형식으로 표현하지 않으며 도리어 범죄자로부터 피해를 받은 피해자 개인의 보복으로부터 범죄자를 보호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범죄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타협을 성사시키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나간다. 그러나 만약 공동체의 권력이나 자신이 약화되고 위험하게 될 때에는 형법은 언제나 다시금 준엄한 형식을 취한다.”[각주:6]


“<모든 것은 변상될 수 있다. 모든 것은 변상되어야 한다>라는 명제로서 시작된 정의는 빚을 변상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관대하게 그냥 보아 넘김으로써 끝나는 것이다. 정의는 지상의 모든 좋은 사물과 꼭같이, 자기 자신을 지양함으로써 끝나는 것이다.”[각주:7]

 

니체는 이러한 형법의 자의성을 <정의의 자기지양(自己止揚)>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의 자기지양은 공동체가 수립한 형법과 정의가 선험적 <선과 악>의 관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 순전히 채권, 채무의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 정의의 시초는 원한이 아니라 변상과 쾌감이다.

 

여기까지 니체의 논의에서 정의라고 하는 것이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계약관계로부터 기원했다는 점을 도출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의는 원한에 기인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니체는 이에 대해 정의의 시초는 원한이 아니라 변상과 쾌감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분노와 원한을 구분하는데, 채무자의 약속불이행으로 인한 채권자의 분노는 이에 대한 변상을 요구하는 행위와 함께 하는 적극적인 감정임에 반해, 원한은 어떤 사건 이전에 상태로부터 존재하는 증오, 질투, 시기에 의한 반동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능동적인 인간이든 반동적인 인간이든, 약속과 책임으로 인해 발생한 양심을 가지고 있으나,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을 발명해낸 자는 원한의 인간이라고 니체는 이야기한다. 자신의 외부로 향하는 분노는 양심의 가책을 일으키지 않지만, 자신의 내부로 향하는 질투, 시기, 증오 등의 원한감정은 그것이 자신 내부의 양심으로 향하기에 양심의 가책을 수반한다.

 

그리고 정의와 이것이 구체화된 형태인 법은 바로 적극적인 분노와 변상, 쾌감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지 결코 약한 자의 원한과 같은 반동적인 감정으로부터 수립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이제까지 법Recht의 온전한 운용과 또한 법에 대한 진정한 요구가 지상에 뿌리를 박게 된 것은 대체 어떤 영역에서였던가? 반동적 인간의 영역에서였던가? 천만에! 오히려 능동적인, 강력한, 자발적인, 공격적인 인간의 영역에서였다.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법은 이 지상에서 반동적 감정에 대한 투쟁,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권력 쪽에서 그 힘의 일부를 사용하여 반동적인 파토스가 지나치지 않도록 억제하고, 타협할 것을 강요하는 반동적 감정과의 싸움을 나타낸다.”[각주:8]



 

■ 형벌의 효용 : 형벌과 죄책감, 양심의 가책의 관계는?

 

정의와 법, 그리고 형벌이 원한이라는 반동적인 감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할 수 있다. 형벌의 효용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있는 것이 상식 아닌가?

 

그러나 니체는 이에 대해서 부정한다.

 

범죄자가 재판절차나 집행수속을 실제로 목격함으로써, 얼마나 자기 행위와 행실을 그 자체로서 비난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데 방해받게 되는가 하는 점을 결코 경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범죄자는 자기와 똑같은 행실이 정의를 위해서 행해지고 시인될 뿐 아니라 양심의 가책 없이 행해지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각주:9]

 

"형벌이 또다시 하나의 숙명처럼 희생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을 때, 그로서는 아무런 <내적인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다만 예측치 못했던 사건, 어떤 무서운 자연현상이 돌발했을 때와 같은 느낌, 바윗덩이가 무너져 내려 어쩔 수 없이 짓눌리게 되는 것 같은 느낌밖에는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각주:10]

 

또한 니체는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 이러한 자신의 논증을 강화한다.

 

(스피노자)는 마침내 다음과 같이 자신에게 말했다. 그것(양심의 가책)은 환희의 반대물로서우리의 모든 기대를 비웃은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는 데 수반되는 슬픔이다.(윤리학3부 정리 18 참조 1, 2) 형벌을 받게 된 죄악자들이 수천 년 동안 자신의 <범행>에 대해서 느껴 온 것도, 스피노자가 느낀 바와 같은 것이었다. 즉 그것은 <여기서 뜻하지도 않은 실수를 했구나> 하는 느낌이지, 결코 <그런 것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각주:11]

 

 

 ■ <양심의 가책>의 기원

 

그렇다면 니체는 양심의 가책의 기원에 대하여 어떻게 정의하는가. 그것은 그의 다음의 서술에 명백하게 드러난다.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향해진다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인간의 <내면화>라는 것이다. 이에 의해서 인간은 비로소 훨씬 후에 <영혼>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을 개발해 냈다. (중략) 낡은 자유의 본능에 대해서 정치조직(국가)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구축해 놓은 저 무서운 방벽형벌도 이러한 방벽 중의 하나이지만은 거칠고, 자유롭고, 방랑적인 인간의 저 모든 본능이 인간 자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적의, 잔인, 박해, 공격, 변혁과 파괴의 쾌락이 모든 것이 이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에게로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인 것이다.”[각주:12]

 

정의와 형벌은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며, 더욱이 형벌은 양심의 가책을 일으키는 효용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성직자들에 의해 <영혼>이라는 것이 개발된 후, 형벌 등과 같은 국가적 방벽에 의해 억압된 인간의 본능이 인간 내면으로 향해 들어가는 길이 열리게 되고 <양심의 가책>은 바로 이런 과정 이후에나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양심의 가책이 발생한 이후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학대하며, 인간에게 활기를 불어넣어주었던 용기, 투쟁, 잔혹함이라는 인간의 본능을 자기 내면을 물어뜯는 방향으로 전환시키기에 이르렀다. 니체는 이러한 양심의 가책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괴로워하는 병”(각주 93)이라고 규정한다.

 

 

■ <양심의 가책>이란 부채의식의 항구적 내면화이다.

 

두 번째 에세이의 서두에서 양심은 부채에 대한 기억의 각인으로부터 발생했음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양심이 인간의 내면으로 향하여 스스로를 물어뜯는 형태로 발전한 <양심의 가책>은 공동체에서 어떤 성질을 갖는 것인가?

 

<양심의 가책>이 개발된 이후, 내면으로 향하는 양심에 관한 자기학대는 공동체에 대한 부채의식의 내면화로 나타난다. 즉 공동체를 창시한 최초의 권력자들, 그들의 조상들, 그들의 공동체적, 역사적 채권자들에 대한 부채의식을 스스로 내면화하여 끊임없이 그 부채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품은 채무자들은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자신의 영원한 채권자인 공동체의 조상들에게 부채를 되갚아야 한다는 확신을 갖는다. 그리고 공동체의 권력이 강대해질수록 조상들에 의한 부채는 그들 내면에서 점점 커져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조상은 신격화되어 그 공동체가 추앙하는 신으로 승격된다. 공동체와 종족 내부에서 전승되는 신화의 기원은 바로 이 구성원들의 조상에 대한 부채의식, 그리고 <양심의 가책>에서 기원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도달된 최고의 신인 기독교의 신의 출현은 그만큼 최대한의 채무의 죄책감을 지상에 가져왔던 것이다.”[각주:13]

 

 

■ <양심의 가책>, 부채 상환의 불가능성, 그리고 기독교

 

최고의 신과 같이 최대한의 크기로 커져버린 신에 대한 부채는 인간에게 상환이 불가능한 것으로 다가온다. 이에 따라 인간의 죄 또한 보상이 불가능해진다. 이로부터 <영원한 벌>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이 희망 없는 상황 앞에서 (니체에 의하면) 기독교는 천재적인 수완을 발휘한다. 바로 신이 인간의 죄 때문에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관념이다. 신 스스로가 자기로 인해 인간에게 지워졌던 부채를 자신에게 지불한다. 바로 자신의 채무자인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말이다. 이를 통해 신은 인간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인간은 신의 사랑을 갈구하며 구원을 부르짖게 된다. <양심의 가책>, 그리고 이것으로 인한 자기멸시와 자기부정이 이에 대한 유일한 구원자인 신에 대한 철저한 헌신으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인간은 자신이 발딛고 있는 대지에서의 삶과 인간 본능으로서의 활기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오로지 이상과 진리, 천국이라는 피안을 갈구하며 그들이 발딛은 대지를 허무로 가득찬 지옥으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이 니체가 지적한 인류를 뒤덮은 허무주의이다.

 

 

■ <양심의 가책>과 허무주의로부터의 진정한 구원 : 짜라투스트라

 

니체는 이러한 진단으로부터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인간이 진정으로 지향해야할 모습이란 어떤 것인지를 간단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니체가 바라는 인간은 바로 그의 유명한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그 짜라투스트라이다.

 

언젠가는 이 썩어 버린 자기 회의적인 현재보다 훨씬 억센 시대가 오면, 커다란 사랑과 경멸을 지닌 저 구원의 인간이, 자신의 강제력 때문에 어떤 초연한 곳이나, 어떤 피안의 경지에 머물 수, 쉴 수 없는 저 창조적 정신이 반드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중략) 이 반그리스도자, 반허무주의자, 이 신과 허무의 초극자(짜라투스트라)는 언젠가 반드시 온다.”[각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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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69 [본문으로]
  2.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70 [본문으로]
  3.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71 [본문으로]
  4.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73 [본문으로]
  5.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75 [본문으로]
  6.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80 [본문으로]
  7.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80 [본문으로]
  8.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83 [본문으로]
  9.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89-90 [본문으로]
  10.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90 [본문으로]
  11.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91 [본문으로]
  12.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92 [본문으로]
  13.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98 [본문으로]
  14.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10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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