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학술

[도서 리뷰 정리]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 『계몽의 변증법』 / 「계몽의 개념」 / 문학과 지성사

by Radimin_ 2016. 9. 21.
반응형

- 목 차 -

1. 계몽의 첫 출발 : 인식

2. 계몽과 신화의 관계 :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3. 계몽과 신화의 관계 : 계몽에 의한 신화의 해체

4. 계몽과 신화의 관계 :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

5. 수학 : 계몽의 경전

6. '계몽의 변증법'과 역사

7. 계몽에 의해 물화된 사유 : 도구적 이성

8. 아도르노의 진단 : 지배의 해체




관련 포스팅

[도서 리뷰 정리]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 『계몽의 변증법』 / 「문화산업 :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 문학과 지성사



아도로노,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각주:1]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인류는 이성이라는 고유한 능력을 도구로 사용하여, 자연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점차 자연을 정복해왔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인류는 진보를 이룩해왔다. 진보라는 말 속엔 어느 정도의 낙관이 함축되어있고, 인류는 스스로의 진보를 믿으며 인류의 미래를 낙관한다. 양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20세기 초의 유럽인들은 특히나 자신들의 위대한 업적과 희망찬 미래를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러한 시선에 의문을 던진다.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유례없는 참상을 겪으면서 피할 수 없는 의문점에 봉착하게 된다.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상태에 빠졌는가.”[각주:2]


이러한 의문으로 출발하여 인류의 진보과 계몽이 갖는 의미에 대해 고찰해낸 것이 바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이다.


그들은 계몽에 대한 탐구와 고찰의 결과물로서 여러 철학적 단상을 손에 넣게 되는데 이 단상들을 모아 엮은 것이 바로 이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먼저 계몽의 개념과 ‘계몽의 변증법’, 그리고 이러한 변증법이 인류에게 가져온 비극이 무엇인지를 개괄하는데 그것이 바로 「계몽의 개념」이란 장이다. 


이를 토대로 아도르노는 뒤이어 호머의 『오디세이』, 마르퀴 드 사드 백작의 문학작품들을 분석하면서 계몽의 변증법이 어떤 형태로 인류에게 각인되어 왔는지를 문학작품의 비유를 들어 좀 더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문화 산업 :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반유대주의적 요소들 : 계몽의 한계」 장을 통해 그들이 통찰해낸 계몽의 변증법이 실제 인류의 사회와 이데올로기에 어떤 식으로 침투해 들어갔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힌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핵심적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


이 아리송한 문장이 이 책 전반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는데, 먼저 이 문장의 의미를 밝혀보고자 한다. 



1. 계몽의 첫 출발 : 인식


계몽이란 자연으로부터 오는 공포를 물리치고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에 두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계몽은 먼저 세계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서의 인식이란 즉자적인 자연을 인간의 창조물인 언어를 이용해 이름붙이고 개념화하여 인간의 관념체계 속에 포섭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인간이 이러한 인식을 선행하지 않으면 그저 자연으로부터 닥쳐오는 임의적인 재해와 폭력에 대하여 임기응변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예컨대 인간이 살면서 수 없이 겪게 될 모든 폭풍이란 자연현상들은 ‘폭풍’이라고 이름 붙여지고 개념화되기 전까지는 각각 독자적인 미지의 위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 현상이 ‘폭풍’으로 개념화되는 순간 ‘폭풍’이란 개념 속에 폭풍의 특성과 성질이 고정되어 인간은 폭풍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바로 인간의 자연 지배에 대한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계몽을 통해 즉자적인 자연은 인간의 관념 속에서 총체적인 체계를 이루며 ‘자연의 통일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관념 속 자연과 즉자적인 자연을 동일시함으로써 ‘자기 동일성’을 획득한다.



2. 계몽과 신화의 관계 :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계몽은 미지의 것, 신비적인 것과 주술, 마술적인 모든 것을 배격하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개념화하여 개념체계 속에 통합하려 한다. 따라서 계몽은 신비와 주술을 포함하고 있는 신화와 적대 관계가 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인류의 역사에서 신화는 계몽에 선행하여 발생했다. 그렇다면 신화란 인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가 문제시 된다. 



신화는 신비와 주술을 포함한 비합리적 방식이기 때문에 계몽과 대척관계에 놓여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볼 때 계몽과 신화의 관계는 단순한 대척관계가 아니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자연의 폭력과 위협 앞에서 인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점차 자연을 형상화하거나, 혹은 자연과 동화되는 주술적인 방식 등을 통해 자연을 숭배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자연의 위협에 대하여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란 바로 자연과 교감하며 자연을 달래고 숭배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의 각 요소들에 대한 언어적 개념화가 이루어진다. 인간은 자연의 세세한 현상과 양태에 대하여 특징과 성질들을 기준으로 자연을 언어 안에 포함시키고, 또 이 개념 속에 담긴 특징들을 본 따 상징이나 형상 등을 만들어 이를 신격화하여 숭배한다. 이미 이 과정에서 자연을 인간의 관념 속에서 통합하고자 하는 계몽의 방식이 사용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자연물과 형상에 ‘인격’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이때가 바로 신화의 발생 시점이다. 신성시하던 자연에 대하여 ‘인격’을 부여한다는 것은 인간적 특성이 신적인 위치로 격상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점부터 알 수 없는 미지의 원리가 아닌, ‘인격을 가진’ 신이 자연을 주재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연지배라는 계몽의 원초적 모습이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계몽과 신화의 관계 : 계몽에 의한 신화의 해체


그러나 계몽은 자신의 원초적 모습인 신화를 가만두지 않는다. ‘인격을 가진 신’에서 신이 가지고 있는 신비와 비합리성에 대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신화에서 자연은 인간의 형상을 띤 신을 통해 인격에 포섭되었으나 아직은 미지와 마법, 신비적인 속성을 간직한 채 인간에게 숭배를 받으며 인류 위에 군림하고 있다. 계몽은 이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계몽은 개념체계를 더욱 발전시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신의 자리를 분쇄하며 개념체계 속으로 편입시킨다. 이른바 ‘탈마법화’를 통해 계몽은 신화를 무자비하게 해체해버린다. 



신화에 의해 인격신으로 주체화되었던 자연은 이제 계몽에 의해 그 주체성을 박탈당하고 관찰과 통제의 대상인 객체의 지위로 떨어진다. 이로써 모든 즉자적인 자연은 인간을 위한 사물이 된다. 



신화가 자연과의 동화를 통해 자연지배로 나아가는 미메시스적 행동 방식에 입각해있다면, 계몽으로 대변되는 근대의 합리적 행동방식은 주체와 객체의 철저한 분리로 나아간다.



여기까지가 이미 계몽이었던 신화가 더욱 철저한 계몽의 과정에서 해체되어버리는 과정이다. 하지만 신화를 해체한 계몽은 또다시 신화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아도르노의 이러한 패러독스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4. 계몽과 신화의 관계 :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


계몽은 신화를 해체하고 자연을 객체의 지위로 떨어뜨리면서 동시에 인간을 주체로서 세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계몽은 그 자신이 배척하고자 했던 신화 속으로 떨어져버린다. 



간단히 말해 계몽은 신화의 해체를 통해 이룩한 ‘정신’, ‘진리’, 그리고 ‘계몽 그 자체’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빠져버린다. 계몽은 모든 사건을 탈마법화하면서 그것을 일어난 사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 사건들을 토대로 반복성을 추려내어 ‘법칙’을 이끌어낸다. 문제는 이 반복과 법칙이라고 하는 원리가 사실 계몽이 벗어나고자 했던 ‘신화적 운명의 속박’의 다른 이름이라는 점이다. 



신화의 시대에서 신화적 운명의 속박 아래 놓인 인간은 신화를 벗어나서 사유할 수 없다. 그의 모든 인생은 이 운명에 예속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계몽은 계몽이 만들어낸, 질을 탈각시키고 양적 차원으로 환원시켜 확립한 법칙과 체계를 벗어나서 사유할 수 없는 것이다. 신화가 신화에 의해 사유되지 못하고 계몽에 의해 해체되었듯이, 계몽은 계몽 그 자체를 사유할 수 없다. 오직 계몽의 계몽에 의해서만 계몽은 사유될 수 있다. 그러나 신화에 빠져버린 계몽에게 이러한 반성의 계기는 나타날 수 없다.



계몽이 추구했던 자연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연에 대한 지배는 역으로 보편법칙이라고 하는 또 다른 자연의 굴레 안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뿐만 아니라 계몽의 주체라고 ‘착각된’ 인간마저도 계몽의 지배 대상인 객체의 지위로 추락하여 인간을 제2의 종속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다. 



“계몽의 도구인 ‘추상화’가 추상화하는 대상에 대해 갖는 관계는, 운명ㅡ계몽은 이 개념을 폐기시키려 하지만ㅡ이 대상에 대해 갖는 관계와 동일하다.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반복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평준화하려는 ‘추상화’, 그리고 추상화가 봉사하는 ‘산업’의 지배 아래 마침내 ‘해방된 자’들은 헤겔이 계몽의 결과라고 지칭한 ‘군중’이 되었다.”[각주:3]



“신화가 죽은 것을 산 것과 동일시한다면, 계몽은 산 것을 죽은 것과 동일시한다. 계몽은 과격해진 신화적 불안이다.”[각주:4]



5. 수학 : 계몽의 경전


계몽은 신화가 신과 경전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학이라는 경전을 떠받든다. 계몽은 수학을 진리와 동일시한다. 계몽은 수학을 통해 그 자신이 일찍이 두려워하고 증오했던 비합리성과 비동일성을 무참히 파괴하며 수학적 논리 안에 포함시킨다. 



사유는 수학과 동일시된다. 1+2=3임을 부정할 수 없도록 사유는 수학에 의해 철저히 물화된다. 물화된 사유는 수학적 법칙과 알고리즘을 따라 이동하는 일종의 ‘정해진’ 운동일 뿐 그 바깥을 상상할 수 없다. 이러한 물화된 사유가 축조해낸 사조가 실중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실증주의의 관점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허용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란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즉 수학적으로 표현이 불가능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며, 계몽과 실증주의의 입장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1+2=3이라고 하는 것은 3=3과 같은 것으로 동어반복이다. 이 밖에 등식으로 표현되는 모든 것(수학적인 모든 것)은 동어반복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계몽과 수학, 그리고 실증주의의 사유는 바로 이 동어반복 속에 갇혀 물화된다. 계몽이 그 자신의 운명인 법칙 속에 갇혀 신화로 빠진다는 것은 바로 이 점을 의미한다. 



“수학적 형식주의는 직접성의 가장 추상적 형태인 숫자를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사유를 단순한 직접성에 묶어둔다. ‘사실성’만이 정의로 인정되며, 인식은 사실성의 단순한 반복으로 제한되고 사유는 단순한 ‘동어반복’이 된다.”[각주:5]



6. '계몽의 변증법'과 역사


여기까지 계몽과 신화의 변증법적 관계, 즉 ‘계몽의 변증법’을 살펴보았다. 아도르노의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과는 달리 ‘정(테제) - 반(안티테제) - 합(진테제)’의 과정을 통해 최종점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변증법은 최종점이 존재하지 않는 신화와 계몽의 영원하고도 닫혀있는 순환고리에 가깝다. 



이러한 관념적 논리가 현실에 대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인지 의아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계몽에 대한 낙관이 극에 달한 시대, 즉 20세기 초의 유럽 제국주의가 팽배한 시대를 조명하면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이 인류의 역사와 현실에 대하여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신화와 미신, 비합리성이 계몽에 의해 추방되고, ‘비합리적인’ 질이 ‘합리적으로 계산 가능한’ 양으로 치환되어 수학적 도식 안에 편입되던 당시 유럽의 낙관은 기존과는 전혀 다른, 그리고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자연재해보다도 참혹했던 세계대전이란 ‘자연의 폭력’ 앞에 노출되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제2의 자연이 합리주의로 무장한 계몽을 비웃기라도 하듯 예상치 못한 폭력의 형태로 인류를 강타했던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인간까지도 모두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고 자부하던 계몽, 그리고 합리주의와 수학적 법칙 속에서 통제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 낙관하던 계몽은 인류 최대의 비극인 세계대전(그것도 두 차례에 걸친)을 통제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계몽은 오히려 이 세계대전을 잘 ‘통제’했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 계몽의 합리주의와 수학적 법칙은 가장 효과적으로 전쟁을 통제했다. 인간을 수치로 환산하여 단위면적 당 최대의 살상력을 보유한 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계몽은 전쟁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힘을 드러냈다. 이 가운데 전쟁을 통제하지 못하고 죽어나간 것은 ‘인간’이었을 뿐 ‘계몽의 정신’이 아니었다. 계몽이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계몽의 도구가 되어버린 이러한 양태는 과거 자연과 신화적 신이 엄청난 위력으로 인간에게 엄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객체의 지위로 떨어뜨렸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몽의 변증법’과 관련하여 아도르노가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상태에 빠졌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된 계기였다.



“끊임없는 진보가 내리는 저주는 끊임없는 퇴행이다.”[각주:6]



7. 계몽에 의해 물화된 사유 : 도구적 이성


자연의 공포에서 벗어나 자연 지배를 통해 낙관적인 진보를 부르짖던 계몽이 이렇듯 엄청난 비극 앞에 서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계몽에 의해 물화되어버린 사유, 즉 인간의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추락해버린 데 있다. 



아도르노는 도구적 이성과 진정한 이성을 구분한다. 도구적 이성이란 특정한 부정의 능력을 상실하고 오로지 자기유지의 도구로서만 기능하는 이성이다. 도구적 이성은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있어서 최선의 방식을 추구하지만, 정작 그 목적 자체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는다. 어떤 실천의 최종점이 벼랑 끝이라고 해도 도구적 이성은 이 벼랑 끝에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도달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끝이 파멸이라는 점은 사유하지 못한다. 



“철저히 목적 지향적인 이러한 이성은 정확한 계산 아래 이루어지는 물질 생산처럼 가증스러운 것이지만 이러한 상황이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만은 계산 불가능하다.”[각주:7]



8. 아도르노의 진단 : 지배의 해체


‘계몽의 변증법’ 속에 휘말려들어가 제2의 종속상태에 빠져버린 인류의 상황에 대하여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지배하는 과학에 의해 오인된 근원으로서의 자연이 기억될 때 계몽은 완성되고 스스로를 지양한다. <우리가 실제로 자연 위에 군림하는> 베이컨의 유토피아가 전(全)지구적 차원에서 실현된 오늘날, 그가 정복되지 못한 자연의 탓으로 돌린 강압의 본질이 명백해졌다. 그것은 지배 자체였다. 베이컨의 견해대로 확실히 ‘인간의 우월성’의 근거인 ‘지식’은 이제 지배의 해체로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 세계에 봉사하고 있는 계몽은 이러한 가능성 앞에서 대중의 총체적 기만으로 변질된다.”[각주:8]



아도르노의 진단은 상당히 비관적이다. J. 하버마스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 대하여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 중의 하나”라고 표현한 것도 바로 아도르노의 비관적 통찰과 진단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렵기는 하지만 완전히 비관할 필요는 없다. ‘계몽의 변증법’이 폐쇄성을 띠고 그 안에서 끝없이 순환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사유는 이 변증법 속에 완전히 포섭되지는 않았다. 이는 계몽의 바깥에서 계몽을 바라보는 아도르노의 저서 『계몽의 변증법』 자체가 증명하고 있다. 더불어 이 작품이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키고 오늘날 수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또 하나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계몽의 변증법』의 전반부를 정리해보았다. 조만간 이 작품의 후반부를 향해 달려갈 계획이다.


관련 포스팅

[도서 리뷰 정리]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 『계몽의 변증법』 / 「문화산업 :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 문학과 지성사



  1.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지성사, (2001) [본문으로]
  2.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지성사, (2001), pp.12 [본문으로]
  3.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지성사, (2001), pp.37 [본문으로]
  4.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지성사, (2001), pp.41 [본문으로]
  5.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지성사, (2001), pp.57 [본문으로]
  6.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지성사, (2001), pp.70 [본문으로]
  7.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지성사, (2001), pp.62 [본문으로]
  8.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지성사, (2001), pp.79 [본문으로]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