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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화

[영화 리뷰] 박찬욱 감독 「아가씨The handmaiden」 (스포일러 주의)

by Radimin_ 2016.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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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에는 해당 영화에 대한 직간접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할 예정이신 독자분들은 영화 관람 후 본 포스팅을 읽을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본 포스팅에는 성()과 관련된 용어들이 등장하나 선정성과는 무관한 학술적, 문학비평적 내용을 담고 있음을 밝힙니다.

 



영화 「아가씨The handmaiden」는 세라 워터스의 장편 소설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한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중심적인 내용은 원작 소설을 따르고 있다.

 

이 작품은 동성애, 사도-매저키즘을 다룬 파격적인 내용과 강한 노출씬 등으로 인해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다. 실제로 영화를 감상하다보면 작품 특유의 코드와 노출씬의 강도에 깜짝 깜짝 놀라게 된다.

 

이 글에선 해당 작품의 내용이나 스토리 전개를 소개하기보다는 이 영화에 담긴 코드와 상징들을 해석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직간접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감상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글을 읽을 때 주의하길 바란다.

 



영화에 담긴 성적(性的) 코드 : 사도-매저키즘과 동성애


 

이 영화에 담긴 주요 코드 중 하나는 사도-매저키즘이다.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동성애의 코드에 대해선 쉽게 포착하지만, 사도-매저키즘 코드에 관해서는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사도-매저키즘이란 코드가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관념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금기Taboo로 여겨지는 성적 도착증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매저키즘을 배제하고서는 이 영화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데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담긴 사도-매저키즘 코드를 먼저 분석한 뒤, 이 요소가 동성애 코드와 어떠한 관련성으로 엮이게 되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 사도-매저키즘


사도-매저키즘이란 사디즘과 매저키즘(마조히즘)를 통칭하는 용어이다. 사디즘과 매저키즘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관념으로 묶여 있다.


사디즘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태생의 귀족 마르키 드 사드 후작의 문학으로부터 유래한 개념이며, 사드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사디즘은 흔히 가학적 성적 도착을 의미하는 용어이지만, 학문적으로는 인간의 심리와 무의식, 인격, 문화를 아우르는 훨씬 넓은 범주의 용어로서 사용된다.


매저키즘은 오스트리아의 작가 레오폴트 리터 폰 자허마조흐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개념으로, 흔히 피학적 성적 도착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사용된다. 하지만 사디즘의 경우와 같이 매저키즘 또한 학문적으로는 성적 도착에 국한하지 않고 보다 넓은 범주로 사용되고 있다.


사디즘과 매저키즘은 그 특성상 마치 한 쌍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욕망의 충족을 위해 사디즘은 매저키즘에, 매저키즘은 사디즘에 각각 의존하고 있다. 이 두 경향에 대하여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가한 바 있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삶에 대한 충동(에로스)와 죽음에 대한 충동(타나토스)가 존재하는데, 사디즘과 매저키즘은 인간이 내재하고 있는 죽음충동이 성적욕망으로 옮겨가 성적 쾌락의 형식으로 충족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 문화적 가치판단을 떠나 프로이트의 심리학 관점으로 봤을 때, 사디즘과 매저키즘은 인간이 죽음충동에 의해 실제로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을 방지해주는 일종의 성적, 심리적 방어기제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디즘과 매저키즘은 죽음충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성적욕구와는 달리 비생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사회적, 문화적인 관점으로 볼 때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심리적 요소가 될 수 있으므로 사회적으로 금기의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단순히 성적(性的)영역 안에서 사도-매저키즘을 논한다면, 사회적 금지가 작동하고 있는 일반문화 속에서 사도-매저키즘은 그다지 의미있는 관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적 사도-매저키즘이 죽음충동의 은유로서 출발한 것과 같이, 성적 사도-매저키즘 또한 성적인 영역에만 머물러있지 않고 인간의 심리, 인격, 문화의 영역으로 은유되어 확장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에리히 프롬이 자신의 저서 자유에서의 도피에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으므로 다음의 포스팅을 참고하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사도-매저키즘의 관념이 이 영화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자


 

■ 사디스트 코우즈키와 서적 낭독회

 

이 영화의 제목 아가씨가 지칭하는 하나의 인물이기도 한 히데코(김민희)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부모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채 이모와 이모부의 집에서 성장한 일본 귀족집안의 딸이다. 히데코의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는 여러 나라의 서적과 골동품을 수집하고, 귀족들을 초청하여 서적 낭독회를 열어 서적을 경매에 부치는 것으로 부를 축적해가는 인물이다.

 

여기서 이 낭독회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수집하고 판매하는 서적들은 성적인 내용을 담은 문학으로 코우즈키가 초청한 귀족들은 히데코의 생생한 낭독을 듣고 성적인 욕구를 충족하며 서적 경매에 참여한다. 코우즈키는 히데코에게 가혹한 낭독훈련을 시킴으로써 낭독회에서 귀족들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만들어버린다. 어렸을 적부터 가혹한 학대와 훈련을 받아온 히데코는 성적인 욕망을 상실한 채 코우즈키가 벌이는 사업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코우즈키라는 인물 그 자체가 사디스트이기도 했는데, 그의 사디스트적 면모는 히데코를 훈련시키는 과정이나 그의 비밀지하실에 설치된 각종 고문도구를 통해 나타난다. 사디즘은 본질적으로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불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타인을 완전히 복종시켜 자신 안으로 포함시킴으로써 스스로의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 사디즘의 메커니즘이다. 얼핏 사디즘은 타인을 복종시켜 자신의 힘을 확장한다는 점에서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사디즘은 명백히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하는 현상이다. 외면상으로는 사디즘이 타인을 지배하고 고통을 가함으로써 완전한 주체성을 획득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사디즘은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오히려 복종하는 자에게 종속된다. 사디스트는 복종하는 자를 반드시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의 지배는 독자적으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 따라서 매저키스트가 사디스트에게 복종하듯이, 사디스트 또한 매저키스트에게 종속된다. 이러한 사도-매저키즘적 관계 속에는 자유의 속성이 상실되고 상호종속만이 남게 된다.


코우즈키는 사실 조선총독부로부터 금광 채굴권을 받아 부자가 된 조선인으로, 일본을 동경하여 스스로가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 위해 일본의 몰락한 귀족 딸과 결혼하여 성까지 코우즈키로 바꿔버린 인물이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기만 속에 빠져버린 인물을 표상한다. 그는 조선인이라는 굴레 속에서 막대한 부를 통해 불완전한 자유를 획득한다. 그러나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태생적 조건으로 인해 코우즈키의 죽음충동은 극에 달하게 되고(조선인이라는 자기정체성을 말살하고자 함) 이것이 성적 도착으로 연결되어 타인을 지배하는 것으로 그 욕망의 구멍을 채우려고 하는 사디스트가 되어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영화에서 등장하는 낭독회의 한 장면에서 히데코의 낭독을 감상한 귀족들이 이번 작품은 사드풍이군요.”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사디즘 코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사도-매저키즘 코드가 남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코우즈키, 낭독회에 참여하는 귀족들, 낭독되는 코우즈키의 서적들은 모두 남성을 표상하고 있다. 히데코는 이러한 남성들의 사도-매저키즘적 성적 판타지를 연기하고 구현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뿐, 정작 히데코 자신은 성적 욕망을 상실한 채 남아있다. 폐쇄적이고 일방적인 환경 속에서 히데코는 사도-매저키즘과 더불어 종속된 여성이라는 이중적 종속구조에 묶여있는 여인으로 표상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사도-매저키즘은 동성애(레즈비어니즘)와의 대립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 이중적 종속구조에 갇혀있는 여인 히데코

 

히데코라는 인물을 분석하기에 앞서 이 영화의 제목과 그녀와의 관련성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의 제목 아가씨(영문 제목 The handmaiden)’는 그 자체로 하나의 암시를 깔고 있다. 먼저 한글제목인 아가씨는 귀족 집안의 아가씨인 히데코의 표면적 정체성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영문제목 The handmaiden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handmaiden 미국·영국 [|hӕndmeɪdn][각주:1]

1. 하녀

2. (비유적인 의미로 쓰여, 다른 것을 보완해주는) 시녀

 

한글제목과 영문제목 간의 의미상의 괴리는 히데코란 인물의 표면적 정체성과 그녀가 처해있는 진정한 위치를 모두 지칭하고 있다. 앞의 분석에서 히데코가 사도-매저키즘, 종속된 여성이라는 이중적 종속구조에 묶여있는 여인의 표상이라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영문제목 ‘The handmaiden’은 사도-매저키즘 구조 속에 종속되어있는 히데코를, 한글제목 아가씨는 코우즈키의 저택에 감금되고 남성의 성적 관념 속에 종속된 여인 히데코를 암시하고 있다. 제목이 주는 암시를 통해 우리는 히데코란 인물과 관련된 하나의 단서를 획득할 수 있다.

 

히데코는 사도-매저키즘에 종속되어있으나, 그 자신이 매저키스트는 아니다. 매저키스트는 스스로 타인에게 복종하여 자신의 자유와 정체성을 말살시키고자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나, 히데코는 단지 코우즈키의 압도적인 영향력 안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사도-매저키즘 구조에 종속되어있을 뿐이다. 따라서 히데코는 이러한 종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언제든 자살할 수 있게끔 이모가 자살할 때 사용했던 밧줄을 간직하고있다(나중에 밝혀지지만 히데코 이모의 자살은 사실 위장된 타살이다). 그녀에게 종속으로부터의 구원은 오직 죽음뿐이며, 이는 매저키즘으로 치환되지 않은 채 순수한 죽음충동으로서 그녀 안에 머물게 된다.

 

 

■ 히데코의 파멸자 숙희, 히데코의 구원자 숙희

 

이중적 종속구조에 감금된 비운의 여인 히데코는 사기꾼 후지와라 백작(하정우)의 표적이 되어 후지와라의 사기극 속에 휘말리게 된다. 후지와라는 사실 조선인 태생의 전문 사기꾼으로 히데코가 처한 입장을 낱낱이 꿰고 그녀에게 접근해 혼인하여 그녀가 상속받은 막대한 재산을 가로챈 뒤 그녀를 정신병원에 가둘 음모를 꾸미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바람잡이 역할이 필요했던 후지와라는 전문 도둑이었던 숙희와 계약하여 숙희로 하여금 히데코의 하녀로 들어가 자신의 계획을 도울 것을 제의한다. 후지와라와 계약한 숙희는 히데코의 하녀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계획을 실현할 준비를 한다.


숙희는 히데코를 파멸시키고 그를 통해 막대한 부를 챙겨 조선을 떠나 자신의 자유를 실현할 꿈에 부풀어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예상치 못한 변수와 마주치게 된다. 숙희는 히데코의 하녀생활을 하면서 히데코가 처한 비극적 운명을 차츰 직시하게 되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히데코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에 따라 숙희는 자신의 계획과 히데코를 향한 사랑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에 빠진다. 한편 성적 욕망을 상실하고 있었던 히데코는 숙희를 통해 새로운 성적 욕망을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내적 갈등으로부터 히데코의 파멸자였던 숙희가 히데코의 구원자로 변모하게되는 계기가 싹트게 된다.

 

 

■ 남성의 사도-매저키즘 vs 여성의 레즈비어니즘

 

히데코와 숙희 간의 사랑은 레즈비어니즘, 즉 여성 간 동성애로 발전하게 된다동성애는 사도-매저키즘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의미에서 비생산적인 성적 코드이다. 그러나 동성애가 사도-매저키즘과 같이 죽음충동에 뿌리박고 있다고 확언할 순 없다.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생명을 생산해낼 수 없는 비생산적 성적 코드이지만, 사랑이란 관점으로 봤을 때 그 사랑이 타인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타인을 성장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확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사도-매저키즘과 동성애 간의 차이는 보다 분명해진다. 사도-매저키즘은 생물학적 관점에서 생산적인지 비생산적인지 확정지을 수 없지만, 사랑의 관점에선 성장이 아닌 말살을 본질로 하는 명백히 비생산적인 코드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숙희와 히데코를 통해 표상되는 레즈비어니즘은 죽음충동으로부터의 구원이자 삶의 충동으로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분명 삶의 충동에 뿌리박고 있다. 종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죽음을 통해 실현할 수밖에 없었던 히데코는 숙희와의 사랑을 통하여 비로소 자유와 삶의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이 작품의 기저에 존재하는 남성의 사도-매저키즘과 여성의 레즈비어니즘의 대립구도는 죽음충동(타나토스) vs 삶의 충동(에로스)’의 구도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숙희와 히데코가 각각 후지와라와 맺었던 계약을 서로에게 고백함으로써 그녀들 간의 사랑을 가로막고 있던 내적 장벽을 허물어버리는 순간, 히데코가 죽기 위하여 나무에 매달았던 밧줄은 히데코를 죽이지 않고 도리어 히데코를 감금했던 종속구조를 죽인다. 히데코와 숙희가 떠날 때 남겨진 밧줄과 빈 올가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종속구조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코우즈키가 저택을 비운 사이, 서로의 고백을 통해 진실성을 획득한 숙희와 히데코는 코우즈키의 서재로 들어가 사도-매저키즘과 여성종속의 상징물인 그의 서적들을 모조리 파괴한다. 이 지점에서 남성 중심의 사도-매저키즘과 여성 간 동성애인 레즈비어니즘의 대결구도가 극적으로 표현된다.

 

이 과정에서 서재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뱀 동상도 숙희에 의해 파괴된다. 여기서 중요한 상징물로 등장하는 서재의 뱀에 대해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뱀은 인류문명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요 상징동물 중 하나이다. 특히나 흥미로운 점은 상징으로서의 뱀이 선과 악을 넘나들고 있다는 점이다. 전 문명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상징동물인 만큼, 뱀이 갖는 상징성은 매우 방대하다. 따라서 우리는 뱀의 상징성을 특정 범주로 제약할 필요성이 있다. 코우즈키의 저택이 일본과 영국을 모두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작품에서 등장한 뱀의 상징성을 아시아와 서구문명에서의 상징으로 제약할 수 있다.


서양권, 특히 기독교적 관점에서 뱀은 사탄의 상징이자 동시에 지혜의 상징이었다. 실제로 코우즈키(사디스트)가 서재의 뱀에 대해서 언급할 때, ‘지식의 경계선이라고 표현했던 점에 미루어보면 서재의 뱀 동상은 악마적 모습으로 표상되는 사디즘과 지식의 표상인 서재를 모두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동양권에서는 뱀은 기본적으로 해악, 파괴, 기만, 교활, 아첨, 추종을 상징한다고 한다. 특히 일본에서는 뱀이 남근을 상징하기도 한다.[각주:2] 이를 종합하면 서재의 뱀은 사디즘과 남성 중심적인 지식(영화에 등장한 남성중심의 성적 관념을 담은 소설), 사도-매저키즘의 특징인 파괴와 추종, 그리고 남성 그 자체의 표상인 남근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숙희가 이러한 상징물을 파괴한 행위는 영화에서 표현된 여성에 가해진 다층적인 억압을 파괴한 것으로서 여성의 육체적 해방이자 성적 해방, 주체성의 해방으로 읽을 수 있다.

 

끝으로 코우즈키와 후지와라의 죽음’, 숙희와 히데코의 해방을 통해 죽음충동에 기반한 사도-매저키즘의 귀결과 삶의 충동에 뿌리박은 레즈비어니즘의 귀결이 죽음과 삶으로 표면화되면서 이 영화는 끝을 맺는다.

 


■ 결론 및 종합

 

사도-매저키즘과 동성애는 공히 문명으로부터 터부의 낙인이 찍힌 성적 코드이다. 하지만 이러한 코드는 인간의 성적(性的)차원에서만 해석되어선 곤란하다.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에서 성적차원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것처럼, 위 두 성적 코드 또한 사회와 문화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위의 두 터부에 대하여 그 근본을 추적해보면 그 끝에서 삶의 충동과 죽음충동, 자유와 사랑이라는 본질적 요소들과 마주치게 된다.


필자가 에리히 프롬의 자유에서의 도피를 정리하면서 작성한 내용과 같이, 사도-매저키즘은 인간 정신의 한 요소로서 전인격적 차원을 넘나들면서 역사를 추동하고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방향을 지시해왔다. 비록 이 영화는 성적인 차원에서 사도-매저키즘과 동성애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 기저엔 인간의 욕망과 자유에 대한 갈망, 진정한 사랑이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들이 결부되어있다.

 

작품의 기저에 존재하는 본질적 요소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간파해내는 눈을 갖게 되면, 문화는 단순히 오락이나 상품의 영역을 넘어서서 인간의 내면과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정신적 유산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 영화에 대한 필자의 해석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관점에 따라 이와는 다른 해석들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그 다양한 해석들이 해석자의 감동과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상 모두 가치 있는 해석이 될 수 있다. 재미와 작품성을 떠나 감상자로 하여금 다양한 사고와 해석의 공간을 열어주는 작품이라면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영화 아가씨The handmaiden’은 꽤 훌륭한 영화라고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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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네이버 어학사전 발췌, http://dic.naver.com/search.nhn?query=handmaiden&ie=utf8 [본문으로]
  2. 나무위키 참조, https://namu.wiki/w/%EB%B1%80#s-1.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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