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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자료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논평

by Radimin_ 2016.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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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적과 동지의 구분


슈미트에 의하면 정치적인 것의 근원은 적과 동지의 구분이다. 적은 자기식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부정할 가능성이 있는 타자라고 말할 수 있으며, 적을 규정함에 있어서는 어떤 규범이나 도덕적, 미적, 경제적인 차원으로부터 독립적이다. 적은 본질적으로 타인 내지 이질자이면 족한 것이다. 

적과 동지의 구분은 정치적인 것의 근원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능력과 의지는 정치적 통일체가 갖추어야할 자격이 된다. 그에 의하면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부터 중대한 사태가 발생할 때, 그 사태에 대한 결정권이 바로 주권이며, 주체적으로 사태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권리, 즉 주권을 가지지 못한다면 정치적 통일체의 단계가 아니라고 본다. 또한 교전권을 갖는 것이 사회적 통일체와 구별되는 정치적 통일체의 특징이며, 정치적 통일체는 공동체를 위해 국민에게 죽음을 요구할 수 있다. 

국민은 정치적인 영역에 존재하며 정치적 통일체인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는 한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는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정치적 통일체는 모든 종류의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에 비해 우위에 있다.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공동체는 선을 추구한다. 추구하는 선은 공동체마다 상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에는 슈미트가 제시한 ‘자기의 존재형식의 보전’이라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목적론적으로 접근할 때, 적과 동지에 대한 구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선이라는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하나의 현상이다. 

이러한 사고에 따르면 적과 동지의 구분은 목적(선)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다. 따라서 적과 동지의 구분은 그것이 목적과 관련될 경우에만 고려될 수 있는 행위가 된다. 이 점에서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근원인 적과 동지의 구분과 관련된 의문점이 생겨난다. 과연 적과 동지의 구분이 정치적 통일체가 갖춰야할 자격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을까?



2. 투쟁상태 vs 경쟁상태


슈미트는 정과 동지의 구분이 정치적인 것의 근원이라고 밝히고 있다. 적의 존재 가능성을 전제한다면 그 가능성 자체가 공동체의 목적에 위협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적과 동지의 구분은 정치적인 것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적의 존재의 현실적 가능성을 외생적인 조건으로 전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투쟁하는 인간의 전체는 반드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인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투쟁하는 인간 전체라는 숙명적 위협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적인 규범적 지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즉 정치 그 자체가 지향해야할 목적의 차원에서, 위협의 현실적 ‘존재가능성’에 대한 ‘조정가능성’을 고려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적의 존재의 현실적 가능성을 제도 등을 통해서 조정 가능한 내생적 요소로 본다면 적과 동지의 구분은 더 이상 정치적인 것의 필수적 개념요소로 규정될 수 없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반드시 타인을 전제하긴 하지만, 타인 그 자체가 적의 존재 혹은 존재 가능성을 완전히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슈미트 자신이 적과 경쟁상대를 구분하고 있듯이, ‘자기의 존재형식의 보전’이라는 선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상호 경쟁하는 경쟁상대가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질서가 형성된다면 적과 동지의 구분의 필요성은 퇴색하고 경쟁상대와 협력관계의 구분에 대한 의지가 정치적인 것의 중요한 요소로서 부상하게 될 것이다. 



3. 슈미트의 성악설적 인간관에 내재한 순환논증의 오류


슈미트는 정치이론과 인간론에 대한 논의에서 선악에 대해 인간의 위험성 내지 모험성에 관한 문제라고 밝히고 있다. 이어서 슈미트 자신은 성악설의 입장임을 피력하며 성악설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는 정치적인 영역이 적의 현실적 가능성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인성적인 낙관론을 전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적의 현실적 가능성은 바로 투쟁하는 인간 전체에서 비롯된 것이며, 투쟁하는 인간 전체는 결국 성악설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성악설적 인간관을 전제하기 때문에 성악설이 정당하다는 순환논리에 불과하다. 

이는 결국 슈미트가 외생적으로 전제하는 적의 현실적 가능성에 대한 자의성을 노정하는 것이 된다. 이렇듯 외생적이고 자의적인 전제조건 하에서 도출된 정치적인 것의 근원, 즉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의지는 결국 그 전제조건 하에서만 정치적 통일체의 자격으로서의 위상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즉, 그가 정치적인 것을 정의함에 있어 내재된 전제조건의 자의성으로 인해 그의 논의는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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