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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자료

정신분석학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크 라캉 정리

by Radimin_ 2016.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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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분석학

정신분석학은 주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탐구로부터 출발하며, 근대 학문의 기초인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반박하면서 이에 대한 반대심급으로 등장하였다. 이는 곧 근대의 주체중심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은 주체는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타자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비판을 수행해나간다.

무의식이라는 개념은 프로이트 이전서부터 그 흔적이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Monad’는 우주 전체의 실재(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개체의 추상적인 설계도이다

이러한 모나드는 인간 각각에 내재되어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있는 모나드를 지각하는 것이 바로 미세지각인데 이 미세지각이 바로 무의식의 초기형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베르그송시간개념에서도 무의식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지만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핵심적 기억 내지 순수 기억이 바로 무의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하지만 무의식 논의가 학문의 영역에서 본격적으로 부상한 것은 프로이트에 이르러서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직접 조명하면서 무의식에 기반한 정신분석학을 창시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자연세계는 카오스이다. 인간 또한 자연이므로 인간에게 내재된 자연 또한 카오스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카오틱한 에너지가 바로 인간을 욕동하는데 이 에너지의 대표적인 예로 자기보존 충동(에로스로 발전)과 리비도(성적 충동)이라고 볼 수 있다. 문명은 이런 카오틱한 에너지와 충동을 억압함으로써 발생한다

그러나 문제는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된다는 데 있다. 프로이트는 억압되어있는 것이 머무르는 장소를 무의식이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무의식에 잠재되어있는 온갖 욕동들은 억압 이후 반드시 회귀하게 되므로, 이에 대한 해소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해소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문명의 원칙인 현실원칙이 된다. 현실원칙은 쾌락을 얻기 위해 따르게 되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쾌락원칙을 따르는 것이 된다

하지만 현실원칙이 욕동을 효과적으로 해소하지 못하면 욕동은 쾌락원칙을 통해 현실원칙에 대한 순응과는 다른 형태로 발현되게 된다. 쾌락원칙은 궁극적으로 평형상태equilibrium를 지향하는데 이는 곧 죽음이 된다. 현실원칙이 욕동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쾌락원칙이 발현되며 이는 죽음 충동인 타나토스적 폭력 성향으로 드러나게 된다. 타나토스적 폭력 성향은 사디즘이나 매저키즘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로부터 온갖 병리적 행태들이 나타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주체를 결정하는 것은 타자이다. 이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설명된다. 아이(남자)는 어머니가 결여하고 있는 팔루스(phallus:남근)에 대하여 자신이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기를 소망한다. 자신이 완전하게 채우고자 하는 어머니의 욕망은 자신이 아닌 아버지를 향해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자 하지만 팔루스의 소유자인 아버지는 아이에게 거세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곧 거세 컴플렉스가 되어 아이는 결국 아버지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팔루스에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아버지의 팔루스에 자신을 동일시하게 됨으로써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에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 욕망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드에서 자아가 만들어지게 되며, 아버지는 타자로서 현실원칙이 되고 또한 초자아가 된다. 초자아는 자아 외부에 있는 것으로서 윤리나 법 등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초자아를 내면화하게 될 때 주체가 탄생하게 된다. 초자아는 이드와 결탁하여 자아를 공격할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온갖 병리적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 자크 라캉

철학자이며 구조주의자에 속한다(하지만 전형적인 구조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캉은 상징계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주체의 고유한 차원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드에 대해 강조하면서 자아는 타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라캉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통해 주체와 무의식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나간다

라캉은 거울이미지에 직면한 아이가 그러한 거울이미지와의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자아를 출발시킨다는 것으로 상상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생후 6~8개월 된 아이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 조각난 몸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신체적으로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면서 그 이미지가 완벽한 자신의 이미지라고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 거울이미지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일 뿐이며 따라서 불완전하다. 하지만 거울이미지에 대해 완전하다고 착각에 빠진 아이는 나르시시즘에 돌입하게 되며 그 거울이미지에 대하여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상상적 동일시이다

거울이미지에 자신을 동일화함으로써 자아를 출발시킨 아이는 그 뒤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한다. 이 지점에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연결된다. 아이는 어머니의 팔루스(남근)에 대한 결여와 욕망을 자신이 충족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하나, 어머니의 욕망은 아이가 아니라 아버지를 향해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거울이미지가 완벽하지 않음을 깨달으며, 또 자신이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상상적 동일시에 의한 욕망이 바로 상상계의 무의식이다. 이를 통해 자아분열이 시작되며 아버지의 팔루스를 따르는 것으로 방향이 전환된다. 팔루스(남근)란 섹슈얼리티를 지시하는 중심 시니피앙으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과정에서 아이의 욕망을 끌어당기는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초자아이자 현실원칙이며, 또한 아버지의 이름Nom-du-père’이라는 언어이자 대타자이다. 아이는 대타자의 질서를 받아들임으로써 언어적 질서에서 자리를 부여받게 되어 주체를 완성시킨다. 이것이 바로 상징적 동일시이자 부성은유를 통한 주체의 완성이 된다. 하지만 주체가 시니피앙에 의해 대리되어 언어적 질서에 자리를 부여받는 과정과 동시에 어머니를 향한 욕망이 구멍이 되어 아이에게 진정한 주체의 결여라는 구멍을 발생시킨다. 이것이 바로 주체 분열의 논리이다

이 구멍을 채우기 위해 주체는 주변의 여러 욕망들을 집어넣지만 그 욕망들은 끊임없이 구멍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시니피앙은 결코 시니피에와 연결되지 못하며, 시니피앙의 끝없는 연쇄를 통해서만 의미를 발생시킨다는 언어 그 자체의 결여성 때문에 언어적 세계에 돌입한 주체의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끝없는 욕망의 환유 과정에 입각할 수밖에 없다. 상징계에 돌입함으로써 끝없은 욕망의 환유적 운동이라는 무의식이 발생한다. 부성은유를 통해 확립된 주체는 그의 욕망이 끊임없는 환유 과정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라캉은 주체는 은유이고 욕망은 환유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대타자의 기의를 창출하고자하는 내재적 욕망이 바로 상징계에서의 무의식이며, 주체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에 종속되어 버리므로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다무의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라캉의 정식화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환유적 욕망은 다른 욕망을 끊임없이 환기시킬 뿐 결코 욕망 그 자체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리고 이는 나를 공허하게 만든다. 진정한 욕망은 상징계에서 무()가 된다. 어머니의 욕망에서 아버지의 팔루스로 동일시 과정이 이행할 때 그 찰나의 순간 잃어버린 그 무언가가 바로 진정한 욕망이자 진정한 주체로서 잡을 수 없는 (Ding, 실재)이다. 대타자라고 하는 언어적 세계에 들어간 순간 시니피앙의 연쇄적 속성에 따라 그 실재는 잡을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 결코 상징화할 수 없으며 언어로 규정할 수 없지만 느껴지는 무언가가 바로 실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니피앙에 묶여있는 언표주체(타자에 의해 주조된 자아, 코기토)를 나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언술 행위 주체로서의 무의식 주체, 즉 진정한 주체와 실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는 것이 라캉의 이론이 갖는 궁극적 함의이자 지향점이다. 시니피앙 논리 안에서 주체가 시니피앙에 의해 대리되면서 상징적 질서 속에서 존재성을 획득하지만, 동시에 사라져버린 그 주체가 바로 무의식 주체이자 우리가 귀 기울여야할 언술 행위 주체인 것이다

나는 사유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고(상징계 안에서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사유하지 않는다(실재계 안에 존재한다. 내가 존재하는 곳은 사유가 가능한 상징계의 외부인 사유할 수 없는 실재계이다).” 

언어의 세계, 상징계를 벗어날 수 없음에도 이를 뛰어넘어 실재를 채우고자하는 실재계를 향한 욕망과 기존의 무의식의 전환은 주이상스를 수반한다. 즉 죽음과 같은 충동이며 고통을 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실재를 향한 욕망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라캉의 처방이다.


관련 자료 : 라캉 『에크리』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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