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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학술

[도서 리뷰 정리] 프리드리히 니체 / 『도덕의 계보』/ 청하 / 첫 번째 에세이《선과 악》《우와 열》

by Radimin_ 2016.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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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할 고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도덕의 계보[각주:1]




 

신은 죽었다라는 언명을 들으면 니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니체를 떠올릴 것이다. 니체는 과연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듯 과감하고도 대담한 언명을 던진 것일까.

 

기존의 가치와 사고체계를 뒤집는 니체 특유의 전도(顚倒)적 사상은 현대철학과 더불어 각종 전위예술과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에도 인류의 정신적 영역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모든 형이상학적 진리를 부정하고 기존의 상식을 파괴하며 인간에게 있어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신에 대해 죽음을 선포할 정도로 과감한 그의 사상은 이해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수반한다. 이는 기존의 사고체계 속에 깊이 젖어온 일반 사람들의 입장에선 당연한 결과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압축적인 아포리즘(잠언, 격언)과 의도적으로 체계를 무시한 형식, 시적 표현으로 점철된 그의 저서가 갖는 서술적 특성도 한몫을 차지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덕적인 반감이 들기도 할 만큼 그의 사상은 파격적이다.

 

도덕의 계보는 니체가 평생을 공격해온 형이상학적 진리들 중 선과 악, 죄와 금욕주의에 관하여 계보학적으로 파헤친 저서로, 그는 이 책에서 선과 악이라는 관념에 덧씌워진 신성성과 절대성을 벗겨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 저서는 아포리즘의 형식이 아닌 에세이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니체의 다른 저서에 비해 독해가 수월하다. 하지만 체계적이지 않은 짜임새를 갖고 있어서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자칫 길을 잃기 쉽다.

 

이 책은 니체의 서문과 더불어 다음의 세 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 첫 번째 에세이 · 선과 악, 우와 열

  • 두 번째 에세이 · , 양심의 가책및 기타

  • 세 번째 에세이 · 금욕주의적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저서는 분량이 많지는 않으나 담겨져 있는 내용이 심오하고, 압축적인 표현이 많다. 따라서 세 편의 에세이를 하나의 포스팅에 모두 정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이 책의 정리는 세 번의 포스팅으로 나눠서 정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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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정리] 프리드리히 니체 / 『도덕의 계보』/ 청하 / 세 번째 에세이: 금욕주의적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덕의 계보』 니체의 서 문



니체는 이 저서의 서문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법칙을 소개함으로써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논리적 회의를 시작한다.[각주:2] 평소에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절대적이라고 받아들여져 왔던 어떤 관습과 사고체계에 대하여, 그 당연성과 절대성으로 인해 그것에 대하여 진중하게 탐구하지 못했던 인간들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을 담고 있는 이 법칙은 앞으로 그가 이 책을 통해 선과 악그리고 도덕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면서 선악의 기원에 대한 최초의 호기심이 싹트게 된 경위를 간단히 밝힌다. 그리고 이러한 호기심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철학적 스승인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배타적인 관계로 들어서게 되었음을 설명한다. 즉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염세주의적 철학을 발전시켜가며 강조했던 ()이기적인 것의 가치, 즉 연민, 자기 희생, 자기 헌신등의 가치에 대하여 그의 표현을 빌리면 종말의 발단, 죽음과 같은 정체(停滯), 회고적인 권태, 삶에 반항하는 의지, 궁극적인 병()의 여리고 우울한 징표를 느꼈던 것이다.[각주:3]




 첫 번째 에세이 · 선과 악, 우와 열



■ <좋음>의 기원, <>의 기원

 

서문을 마치고 니체는 먼저 선과 악’, ‘우와 열의 관념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는 도덕에 관한 역사적 고찰이 자신 이전에 이미 영국 도덕사가들에 의해 수행되었음을 밝힌다. 하지만 그는 이들의 연구에 대하여 비판을 가한다.

 

영국 도덕사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란 개념의 기원은 <좋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좋음>이란 비이기적 행위의 수혜자가 느낀 긍정적 감정이다. 비이기적 행위로 인해 이득을 얻는 사람이 그 행위를 좋은 것이라 평가했으며, 이후 그것은 이득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좋음>이란 관념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좋음>이 바로 <>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영국 도덕사가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니체는 반박한다. <좋음>이라는 것은 영국 도덕사가들이 말한 것처럼 <좋은 것>을 받는 사람 측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행위를 한 <좋은 인간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즉 니체에 따르면 수혜자가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와 상관없이 그러한 수혜를 내릴 수 있는 힘과 권력을 지닌 자들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하여 <좋음>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자신과 구분되는 피지배계급인 수혜자들과 구분하여 <좋은 인간들>이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바로 이 거리감pathos of distance에서 비로소 가치를 창조하고, 거기에다 이름을 붙이는 권리를 획득했던 것이다[각주:4]

 

즉 고급이 하급에 대해 지니는 감정의 총체가 우, 열 대립의 기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체는 두말할 것 없이 하급이 아니라 고급이다. , 열의 대립은 곧 선, 악의 대립으로 치환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선악관념의 기원이다. ‘선악관념은 결코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 <좋음>이란 관념에 대한 어원학적 추적

 

니체는 근대에 통용되는 <좋음>이란 단어의 어원학적 추적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지를 강화시킨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좋음>이란 단어는 어느 언어에 있어서나 “<고귀한>, <귀족적인>이 기본개념이며, 여기에서 <귀족적 영혼의>, <고귀한>, <고결한 영혼의>, <특권 지닌 영혼의> 등의 의미로서의 <좋음>의 개념이 필연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이러한 의미발전과 항상 평행하여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발전에서는 <비속한>, <평민적인>, <저급한> 등이 결국엔 <나쁨>이란 개념으로 바뀌어진다.”[각주:5] 이 밖에 독일어와 그리스어, 게일어에 대한 어원학적 접근 등을 통해 그의 연구를 고증해 나간다.

 


■ 귀족의 몰락과 성직자 계급의 부상에 의한 <우열>개념 변화 - 정치적 우위에서 영혼의 우위로

 

귀족의 몰락 이후 부상하게 된 성직자 계급에 의해 <좋음>이란 관념이 재정립되었다. 기존의 귀족적인 <우월><좋음>이 정치적 우위를 표상하고 있었던 것에 반해, 이 성직자적 <우월><좋음>은 영혼의 우위로 표상되었다. 따라서 귀족적인 것으로 대표되는 전쟁, 모험, 사냥, 무도, 투기, 활기, 거만, 방탕, 권력욕 등의 가치는 더 이상 <좋음>의 성질로서 남아있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것은 성직자적 평가양식에 의해 <나쁜>것으로, 또는 <>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니체는 이러한 성직자적 평가양식에 대하여 무력하고 증오에 가득 차있으며 원한에 기반한 것이라며 맹공을 가한다. 성직자 계급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특유의 활기 없는 무력함으로 인해 귀족적 평가양식으로 대표되는 힘, 용기, 권력욕 등에 대하여 강력한 원한을 품게 되었고 결국 그들이 <좋음>의 선포자로 부상하게 되었을 때, 명랑하고 활기찬 생명적 특성을 모두 말살하여 활기없는 허무주의로 인간을 이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가련한 자만이 선한 자이고,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선한 자이며, 괴로워하는 자, 빼앗긴 자, 병든 자, 추한 자만이 경건한 자이며, 신에 의해 사랑받는 자이며, 축복은 오직 그들에게만 있다그리고 너희, 강력하고 고귀한 자는 이와 반대로 영원히 사악한 자, 잔인한 자, 탐욕스러운 자, 음험한 자, 신에 거슬리는 자다. 뿐만 아니라 너희는 영원히 축복받지 못하는 자, 저주받을 자, 멸망할 자이니라!>라고.”[각주:6]

 

니체는 귀족적 평가양식을 주인의 도덕, 성직자적 평가양식을 노예의 도덕, 원한의 도덕이라고 칭한다.

 

 

■ 귀족도덕과 노예도덕, 그리고 원한

 

니체는 귀족도덕과 노예도덕을 구분하면서, 그것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모든 귀족도덕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기양양한 긍정에서 발전되는 반면에, 노예도덕은 처음부터 <외부적>인 것, <다른> ,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각주:7]


즉 귀족도덕은 <좋음><>의 관념을 자신의 행위와 성질로부터 자발적으로 발전시켜왔음에 반해 노예도덕(성직자적 도덕)은 이 귀족도덕에 대한 원한으로 귀족도덕을 부정함으로서 <좋음><>을 파생시켰다는 것이다. 귀족도덕은 자발적이지만 노예도덕은 근본적으로 반작용이다.

 

“<태생이 좋은 사람>은 스스로를 <행복한 자>라고 느꼈다. 그들은 적의 상태를 살펴봄으로써 인위적으로 자신들의 행복을 꾸미거나, 혹은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거나 기만할(원한을 지닌 모든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그러하듯이) 필요가 없었다.”[각주:8]


무력한 자, 억압받는 자, 마음속에 해악적(害惡的)인 증오 감정이 들끓는 자들의 <행복>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이들(증오의 감정이 들끓는 자들)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본질적으로 마취, 혼미, 휴식, 평화, <안식일>, 긴장을 풀며 사지를 편안히 하는 것으로, 즉 수동적인 것으로 나타난다.”[각주:9]

 

반면 귀족적 인간의 경우

원한 그 자체가 설령 귀족적 인간에게 나타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것 바로 다음의 반동(反動)에 의해서 깨끗하게 지워져 버리기 때문에 아무런 해독을 끼치지 않는다. 약하고 무력한 자들에 있어서는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무수한 경우에도 귀족적 인간에게서는 그 원한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중략) 이러한 인간은, 다른 인간의 경우에는 몸속에 파고드는 많은 구더기를 단번에 뒤흔들어 떨쳐 버린다.”[각주:10]

 

그러한 인간은 스스로를 위해서, 자기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 적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사실 그가 적으로 삼는 것은 경멸할 만한 점이 조금도 없고 진실로 존경할 만한 자에 국한된다. 이에 반해서 <원한>의 인간이 생각하는 적을 상상해보자. 바로 여기에서 그의 행위, 그의 창조가 드러난다. 그는 우선 <사악한 적>, <악인>을 마음속에 품고, 이것을 사실상 기본개념으로 해서 그다음 바로 거기에서 그것의 반대, 대조되는 상으로서 <선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는데이 선인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각주:11]

 

이렇듯 귀족적 인간과 원한적 인간의 신랄한 대비를 통해 니체는 노예도덕과 원한에 대하여 강하게 공격한다.

 

또한 니체는 귀족적 기원의 <나쁨>과 노예, 증오적 기원의 <나쁨>을 대비시킨다. 전자에서의 <나쁨><좋은 인간>인 자신으로부터 파생된 부산물임에 반해, 후자에서의 <나쁨>은 그 자체로 원형이자 시원적인 것으로서 이에 대한 원한을 통해 <좋음>을 정립시켜 나가는 형태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귀족도덕에서의 <좋은 인간>은 원한의 도덕에서는 <>이 되는 것이다.


 

■ 허무주의의 기원

 

니체에 의하면 노예도덕의 득세로 인해 인간은 길들여지고 왜소화되며 평균화된다. 이에 따라 인간들은 점차로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에 지치며, 인간 자체에 지치고, 인간에 대한 공포를 상실한다. 동시에 천박해지고 선량해지며 진중해지고 안락을 추구한다. 즉 귀족적인 활기를 잃어버리고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지쳐버리는 허무주의에 빠져버린다.

 

강한 것에 대해서, 그것이 강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요구하며 그것이 압박욕, 제압욕, 지배욕, 적대욕, 저항욕, 승리욕이 아니기를 요구하는 것은, 실로 약한 것에 대해서 그것이 강한 것으로 나타나기를 요구하는 것과 똑같이 불합리하다.”[각주:12]

 

약자의 복수심은 약한 속성을 선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약한 속성을 의도된 선택이자 하나의 공적인 것처럼 치부한다. ‘약하다는 것그것은 스스로를 무력함 속에 던져넣어 그 속에 머무는 상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해지려 하기보다는 약한 것을 선한 것으로 치환하여 마치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한 선택을 행한 것처럼 행세한다. 하지만 실상은 지극히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며 정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을 뿐인 것이다.

 

 

■ 원한의 인간, 원한의 종교, 원한의 이상

 

이러한 논의에 이어서 니체는 본격적으로 원한의 인간과, 그들의 종교, 그리고 그들이 품은 이상을 구체화시켜 형상화한다.

 

그들은 모든 권위기구에 복종하는 것을 신성한 <순종>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신이 그들에 대하여 모든 권위기구에 복종할 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논거로 로마서 131,2절을 각주로 제시하고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131)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132)

 

이를 통해 그는 원한의 인간이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 속에 복종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자신들이 복종하는 그 권세들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다는 모순을 공격한다.

 

또한 약함을 선함이라고 치부해왔던 그들도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승리를 꿈꾸고 강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들도 역시 언젠가는 강자가 되려고 한다. 이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언젠가는 그들의 <왕국>도 와야 할 것이다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그것을 <신의 왕국>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모든 일에 이처럼 겸손한 것이다! 그 왕국의 도래를 보기 위해서는 죽음을 넘어서 오래 산다는 것이 필요하다<믿음 속에, 사랑 속에, 희망 속에> 사는 이 세상 생활에 대한 보상을, <신의 왕국>에서 영원히 받기 위해서는, 진실로 영원한 생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보상이란 말인가? 어떻게 보상된다는 말인가?”[각주:13]

 

이에 대해서는

위대한 교사(敎師)이며 성자(聖者)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언명(言明)을 들어 두는 것이 좋다. <천국에 있는 축복받은 사람들은>하고 그는 어린 양처럼 부드럽게 말한다. 지옥에 떨어진 자들이 벌받는 것을 보고, 그것으로 해서 자신의 축복을 더욱더 기쁘게 여기리라.(중략) 이 교부는 그의 신도들에게 공개적인 구경거리의 잔인한 환락을 그만두도록 타일렀는데이것은 또 무슨 까닭에서인가?” [각주:14]

 

즉 요한계시록과 최후의 심판은 원한에 의한 복수 그 자체가 아니냐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이 밖에도 니체는 TertullianDe Spectaculis을 인용하면서 원한의 인간과 그들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약함과 강함, 그리고 선함과 악함의 이율배반에 대하여 꼬집고 있다.

 

 

■ <우와 열>, <선과 악>에 대한 역사적 표상 : <로마 대 유태>

 

니체에 의하면 귀족도덕과 노예도덕 간의 투쟁사는 <로마 대 유태>라는 역사적 표상으로 형상화될 수 있다.

 

이는 로마의 멸망으로 인한 로마의 패배, 그 이후 르네상스를 통한 로마의 부활, 하지만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또다시 로마의 패배,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유태의 또다른 승리, 그리고 나폴레옹으로 표상되는 로마적 인간의 부상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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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본문으로]
  2.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22 [본문으로]
  3.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25 [본문으로]
  4.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33 [본문으로]
  5.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34-35 [본문으로]
  6.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41 [본문으로]
  7.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43 [본문으로]
  8.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45 [본문으로]
  9.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45 [본문으로]
  10.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46 [본문으로]
  11.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46 [본문으로]
  12.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52 [본문으로]
  13.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56 [본문으로]
  14.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사람을 보라』, 청하, (1982), pp.5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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