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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학술

[도서 리뷰 감상] 소운逍雲 이정우 저 / 『개념-뿌리들 01』 / 철학아카데미

by Radimin_ 2016.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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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운逍雲 이정우 선생님의 『개념-뿌리들 01』[각주:1]



한창 철학서, 학술서 등을 읽으면서 개념이해의 한계로 인해 기초의 부실을 실감할 때 쯤, 우연히 이 책을 알게 되었다. 학문은 개념의 체계화를 통해 지식을 축적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인데, 정작 중요한 기초 개념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있지 않으면 어떤 훌륭한 책을 읽어도 결코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으며 앎을 확신할 수 없다는 걸 절감했다. 이 책은 이런 난항에 부닥친 나를 다시 바로잡아주는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이 책의 제목인 ‘개념-뿌리들(영어로는 Concept-roots)’은 인간의 지식체계를 이루는 수많은 개념들 중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뿌리가 되는 개념들을 일컫는 것이라 정의된다.



“수천 년의 역사에 걸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재규정되고 있는 개념들, 즉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폐기되는 개념들이 아니라 끝없이 재규정되는 그런 개념들이 존재합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개념들, 즉 일상어이기도 하고 철학 개념이기도 한 그런 개념들이죠. 존재와 무, 우연·가능·필연, 하나와 여럿, 무한과 유한 등의 개념들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지속되어 왔고 또 인류가 존재하는 한 지속될 개념들입니다. 나는 이런 철학적 개념들을 개념-뿌리들이라고 부릅니다.”[각주:2]



지금껏 나는 철학을 접하면서 각각의 개념들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수반하지 않고 단지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애매한 상식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개념이란 동일한 형태의 기표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기의의 측면에선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을 때 오해와 오독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 책은 01권, 02권을 통틀어 총 30개의 ‘개념-뿌리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 중 01권에서 다뤄지는 ‘개념-뿌리들’은 다음과 같다.



  • 원리, 원인
  • 자연
  • 운명, 필연, 우연
  • 존재, 실재, 실체, 본질
  • 하나, 여럿
  • 무한, 유한
  • 범주
  • 인식, 진리



이 책에서 다뤄지는 ‘개념-뿌리들’은 각각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변화되고 축적된 묵직한 사유들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이 ‘개념-뿌리들’ 각각이 담고 있는 의미와 그것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동서양의 사상적 진행과정과 연결시키면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석해주고 있다. 개념들의 역사, 즉 ‘개념사槪念史’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저작을 읽는다고 할 때, 우리는 흔히 이 저작에 실린 개념들을 현대적 의미로 이해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플라톤의 저서가 저술된 시대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역사적 맥락에서 전혀 다른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일한 언어, 동일한 맥락을 당연한 것처럼 가정한 채 고전을 접하곤 하는 것이다. 



더불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형성되어온 사상적 조류와 흐름들을 무시하고서는 각각의 사상들이 갖는 ‘관계’를 포착할 수 없다. 하나의 사상은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상들과의 역사적 흐름과 관계 속에서 부단히 이어진다. 또한 과거의 사상은 과거 속에 박제되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후대의 사상과 해석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빛을 발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반드시 사상사와 개념사를 숙지할 필요가 있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많다.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 중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던 것이지만, 최근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한국의 독서문화에 대해 다룬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대학의 독서관은 발 디딜 곳 없이 북적이지만, 정작 서가의 책들은 펼쳐지지 않고 먼지만 쌓여간다. 다만 주식투자, 처세술, 조잡한 자기계발서, 자격증 관련 서적들은 그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지적 호기심에 입각한 독서는 한낱 나태와 현실도피로 치부되기까지 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책장을 넘기는 나의 손엔 불안과 아픔이 점액처럼 질척거린다. 이는 자신만의 의지로 살아가는 자가 응당 겪어야 할 피할 수 없는 대가일 것이지만, 최근엔 마음이 저려오는 것을 견디기 힘들 때가 많다.



물화된 사유가 지배하는 숨 막힐 듯 건조한 사회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나와 같은 아픔을 느끼고자 뛰어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게 참으로 흥미롭다. 단순 명확하고 가시적이며 ‘실용’적인 가치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문과충’, ‘문송합니다’ 등의 인문학 경시풍조가 팽배하고 있는 이때에 오히려 사람들은 인간적인 무언가를 찾고자 발버둥을 친다. 인간의 내적 자연自然, 즉 스스로 그러한 인간적 본성이 인간 그 자체마저 물화시켜버리는 도구적 이성의 폭압에 견디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교육되고 이식된 가치관과 인간 본연의 내적 자연 간에 존재하는 괴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까 한다. 인간의 자연은 사유하는 것에 있고, 인간은 결코 사유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생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이 인간에 대한 나의 비관론이자 낙관론이다. 어떻게 유기체인 인간이 사유의 능력, 변화와 생성의 능력을 잃고 사물화 되는 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유기체가 사물화 되는 것, 그것이 곧 죽음이고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루 빨리 인간의 내적 자연과 사회가 조화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오길 바랄 뿐이다. 

  1. 이정우 저, 『개념-뿌리들 01』, 철학아카데미, (2004) [본문으로]
  2. 이정우 저, 『개념-뿌리들 01』, 철학아카데미, (2004), pp.2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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