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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학술

[도서 리뷰 정리] 플라톤Plato / 『국가The Republic』 / 삼성출판사 -제2부-

by Radimin_ 2016.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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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 목 차 -

1. 정의에 관한 고찰

  1.1 폴레마르코스의 정의에 관한 주장과 소크라테스의 반박

  1.2 트라시마코스의 정의에 관한 주장과 소크라테스의 반박

    a. 첫 번째 모순

    b. 두 번째 모순

    c. 세 번째 모순

    d. 부정은 정의보다 지혜로운가?

    e. 부정은 정의보다 유능하고 강한가?

    f. 부정은 정의보다 이로운가?


- 제2부 목 차 -

2.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의문 – 정의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인가?

3. 정의로운 국가란 무엇인가

  3.1 국가의 기원와 정의  

  3.2 국가의 덕 – 지혜, 용기, 절제, 정의

4. 정의로운 사람이란 누구인가





제1부에서는 폴레마르코스와 트라시마코스가 각각 생각하는 정의에 관하여 소크라테스가 반박하는 논의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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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보다는 부정이 이롭다고 주장하였는데 소크라테스는 그의 논리에 내재된 모순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부정은 결코 정의보다 이롭지 않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하지만 이상의 논의에서는 ‘정의란 결코 어떤 것이 아니다’라는 논증이 이루어졌을 뿐,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한 명확한 고찰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글라우콘과 그의 형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적극적으로 정의란 무엇인지 묻기 시작한다.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트라시마코스와는 달리 정의와 의로움의 가치를 믿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몸담고 있는 현실세계에선 정의의 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평가절하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 부닥친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과 현실과의 괴리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면서 소크라테스에게 진정한 정의와 선의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줄 것을 절박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따라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자신의 의견을 접어둔 채 세간에서 횡행하는 정의에 관한 그릇된 의견들을 자신의 의견인 것처럼 삼고 소크라테스에게 공격적으로 질문을 하게 된다.



2.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의문 – 정의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인가?


글라우콘의 물음은 상당히 날카롭고도 현실적이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먼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과연 선이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인가? 선이란 그 자체가 좋게 여겨지는 가치이지만, 세간의 많은 사람들은 어떤 일에서 일 그 자체의 좋음보다는 일로 인해 받게 될 보수를 더욱 좋게 여기고 순수한 일 그 자체는 귀찮고 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아무리 선이 좋은 것으로 칭송된다고 해도 현실이 이러하다면 선의 가치는 사실 허황된 것은 아닌가? 현실에서의 선이란 단지 그것이 자신의 명성과 평가에 도움이 될 경우에만 좋은 것으로 대우받는 것은 아닌가?



더불어 정의란 무엇인가? 세간에서 부정한 것은 그것을 행할 때에는 자신에게 이롭지만 그것을 당할 때에는 그 이로움보다 더 해롭다. 따라서 사람들은 부정을 행하지 않고 부정을 당하지도 않는 것에 합의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합의가 법률의 형태로 제정되고 상호간의 계약으로 체결된다. 이렇게 확립된 법률과 계약은 합법적이고 의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정의의 기원이자 본질은 아닐까?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의로운 사람은 사실 그가 부정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부정을 행할 충분한 힘과 능력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정의에 순응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만약 어느 한 사람에게 부정을 당하지 않고도 부정을 행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면 그가 세간에서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 평가된다 하더라도 결국은 부정한 자가 부정을 행하는 것처럼 똑같이 부정을 행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의로움이란 ‘강요’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의로워야 한다는 강요와 제약이 사라진다면 그는 당초 그가 가지고 있었던 ‘부정은 정의보다 이롭다’는 생각에 의해 부정을 행하게 될 것이다. 



또한 부정한 사람이 부정에 대하여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는 부정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전혀 들키지 않고 오히려 의롭다는 평가를 들을 것이다. 부정한 사람이 의롭게 여겨지는 것이야말로 최고로 부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철저히 의로운 사람이라면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어떻든지 자신의 정의를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는 평판과 명예를 욕구하지 않기 때문에 평판과 명예를 철저히 이용하는 부정한 사람에 의해서 가장 부정한 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만약 현실이 이와 같다면 정의를 과연 부정보다 이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논의를 통해 그들은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정의와 부정에 대한 표면적 평판으로부터 오는 이득과 손해가 아니라, 순수한 정의가 그 자체로 어떤 면에서 이로우며, 순수한 부정이 그 자체로 어떤 면에서 악한 것인가?



3. 정의로운 국가란 무엇인가


위의 질문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방대한 논증을 통해 순수한 차원에서의 정의와 부정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며 각각의 이로움과 해악이 어떤 것인지를 고찰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에 관한 논증에 대하여 큰 것에서부터 고찰한 뒤 그보다 작은 세세한 것에서 정의와 부정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밝혀낼 것이라 말한다. 여기서 큰 것이란 국가이며, 작은 것이란 개인을 의미한다. 



3.1 국가의 기원와 정의


국가의 기원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입장은 명확하다. 그것은 자급자족의 어려움 때문이다.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자급자족 상태보다 좀 더 용이하고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하여 특유한 기술들(농업술, 건축술, 직조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다. 이렇게 국가의 초기 형태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다른 여러 일에 자신의 힘을 쏟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특유한 한 가지 기술에 종사함으로써 더욱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는 곧 각 기술들에 속한 고유의 덕에 충실함을 의미한다(여기서의 덕이란 어떤 사물이 제구실을 훌륭히 해낼 수 있도록 만드는 탁월성이다). 기초적인 기술들이 모이면, 각 기술이 수행되기 위해 필요한 여러 도구들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 도구들을 제작하는 기술자들이 국가에 포함된다. 또한 물류의 교환을 위해 상업술이 필요하게 되며, 항해술, 의술 등과 같은 여러 가지 기술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점차 국가의 외연은 커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국가는 점차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 중에서 소크라테스가 가장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외적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고 국가의 방위를 책임지는 ‘방위자들’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방위자들이야말로 국가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핵심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국가의 지배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더욱 엄격하고 완전한 덕과 능력이 요구된다. 방위자는 신체가 강인해야하고 영혼 안에 높은 기개를 간직하고 있어야하며, 지혜를 사랑하는 자여야만 한다. 방위자가 이러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선 국가 내부에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교육이다. 



교육은 음악과 체육, 학문이 주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교육 과목에 대하여 논리의 살을 덧붙임으로써 교육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덧붙여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국가를 위하여 시(詩)는 엄격하게 제한하고 배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시라는 것은 신을 왜곡하여 노래하고, 기개를 꺾으며, 국가에 필요한 각 사람들의 역할에 따르는 덕을 사사로운 감정을 유입시켜 훼손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그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시와 시인들을 비난한다. 



결국 국가의 기원과 형성과정에서 소크라테스가 보여주는 정의란 거칠게 축약하면 이런 것이다. 



“보조자들과 방위자들이,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그래야 하듯이, 그들이 해야 할 일에서 가장 훌륭한 기공(技工)이 되게 하는 것을 행하도록 강요하고 설득해서, 나라 전체가 그렇게 번영하고 잘 다스려질 때는, 각 계급에 그 본성이 허락하는 그런 행복에 참여하도록 허락할 수 있다.”[각주:1]



즉, 국가 구성원이 국가를 위하여 그들의 본성에 따르는 역할과 계급적 위치를 받아들이고 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이것이 잘 지켜지는 국가는 사회 구성원 전체를 위해 옳게 나아가며 선하고 정의로운 국가가 된다.



이상의 논의에서 소크라테스의 국가중심적 사유를 엿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국가에 있어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현대의 의무적, 평등적 교육과는 상당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인간은 각기 특유한 자질과 성품,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이란 국가를 위해서 개개인의 특유한 자질에 가장 적합한 교육을 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에는 국가중심적 사유가 짙게 녹아있는데, 이러한 사유는 비단 교육 영역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국가론 전반에 깔려있다. 그의 논의에서 개인은 전적으로 국가적 필요에 따라 국가에 귀속된다. 심지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자질을 금, 은, 구리, 쇠로 나누어 각각의 자질이 뒤섞이지 않도록 혈통을 유지해야하며, 여자와 아이는 공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선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2천 4백여 년의 역사적 간극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논의를 접할 때는 역사적 시각을 담지한 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고 생각한다. 



3.2 국가의 덕 – 지혜, 용기, 절제, 정의


앞서 덕이란 사물이 제구실을 훌륭하게 해내기 위해 요구되는 탁월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국가의 덕은 국가가 제구실을 훌륭하게 해내기 위해 요구되는 탁월성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국가의 덕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고 이를 각각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 부른다. 



소크라테스가 정의하는 지혜란 곧 깊은 생각이며 지식이다. 국가가 지혜롭기 위해서는 그 어떤 계급보다 방위자, 즉 지배자계급이 지혜로워야 한다. 방위자들이 지혜롭다면 그들의 지배를 통해 국가는 전체적으로 지혜로울 수 있다.



한편 용기란 곧 의견을 고수하는 것이다.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쾌락이나 욕망, 공포 앞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며 이를 결코 잃는 법이 없다. 또한 용기에 의해 지켜지는 의견은 두려워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에 관한 올바른 의견이어야 한다. 이러한 용기는 지혜와 더불어 국가가 지녀야할 또 한 가지 덕이다.



국가의 세 번째 덕은 절제이다. 소크라테스는 절제란 일종의 질서이며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다. 사람을 나쁜 길로 인도하는 숱한 쾌락, 욕망, 고통에 대하여 자신의 더 좋은 부분이 이를 이겨내는 것, 이것이 곧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며 절제이다. 절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고찰하면 곧 조화이자 합주가 된다. 즉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 사이에 펼쳐지는 지배하고 지배받는 관계의 조화와 합주가 바로 국가의 덕으로서의 절제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국가의 마지막 네 번째 덕인 정의는 무엇인가? 정의란 앞서 말한 대로 자기 지신의 것, 자신의 본분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다. 이를 국가적 차원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돈벌이꾼, 보조자, 방위자의 각 계급이 각각 제구실을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각 계급이 나라 안에서 자기 일을 한다는 것이 곧 정의이다.”[각주:2]



정의란 지혜, 용기, 절제와 더불어 국가의 네 가지 덕 중에 하나로 구분되고 있지만, 사실 정의 그 자체는 다른 세 가지 덕을 모두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지혜, 용기, 절제가 갖춰질 뿐만 아니라 이 세 가지 덕들이 ‘제구실에 충실할 때’ 정의의 덕이 갖춰지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정의로운 국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이러한 네 가지 덕이 고루 갖춰진 국가가 바로 진정한 의미의 정의로운 국가이다.



4. 정의로운 사람이란 누구인가


이상의 논의에서 국가구성원들이 본성에 합당한 위치에서 제구실을 다할 때 정의로운 국가가 된다는 것, 그리고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이 국가 안에서 제구실을 다할 때 정의의 덕도 갖춰진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소크라테스는 당초 정의에 대해서 고찰할 때, 큰 부분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작은 부분을 살펴볼 수 있다는 논리에서 먼저 정의로운 국가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그렇다면 국가보다 작은 부분, 즉 정의로운 사람이란 누구인가의 문제로 넘어가야만 한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물을 지배하는 동일한 원리가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국가의 논의를 자연스레 정의로운 사람에 관한 논의로 연결시킨다. 인간은 영혼을 지니고 있다. 또한 영혼에는 본성과 덕이 존재한다. 영혼의 본성에는 이성적인 부분과 욕구적인 부분이 있다. 한편 영혼의 덕은 국가의 덕과 마찬가지로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이다.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은 영혼의 두 부분, 이성과 욕구 사이에서 제구실을 다할 때 그 인간을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다.



“‘정의’로운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서로 다른 부분들이 남의 부분의 일을 하는 것이라든가, 영혼 안에 있는 다른 부분들이 서로 방해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 집안 살림살이를 잘 보살피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배하고, 자기 자신 안에 질서가 있게 하고, 자기 자신과 사이가 좋게 되어, (중략) 조화시켜서, 그것들을 한데 묶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많은 것을 하나로, 즉 절제 있고 조화된 것으로 이루어내되, 그때야말로 돈벌이에 관해서건, 몸을 돌보는 일에 관해서건, 또는 나라 일에 종사하건, 사사로운 거래 관계에 종사하건 무엇인가를 한다면, 그런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바로 영혼의 이 태도를 지니고 또 그것을 만들어내기에 도움이 되는 모든 행위를 정의롭고 훌륭한 것, 그리고 그런 행위를 주재(主宰)하는 지식을 지혜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부르지만, 그런 태도를 늘 뒤엎으려는 어떤 행위도 부정한 것, 그리고 이번엔 그 행위를 주재하는 의견은 무식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부르면서 실천하게 될 것일세.”[각주:3]



이상의 길고긴 논의를 통하여 정의(正義)란 무엇인지 정의(定義)내린다. 정의란 곧 국가와 계급, 영혼의 덕과 국가의 덕, 그리고 이외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본성에 따라 제구실을 다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당초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제기 했던 의문, 순수한 의에서의 정의란 그 자체로 이로운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결론이 난다. 즉 정의보다 부정이 이로우며, 정의는 단지 명성을 준다는 의미에서만 이롭다는 세간의 말들은 옳지 못하며 그 자체가 사실은 해로운 상황임이 드러난다. 개인이 부정을 저지르면 그 순간에는 작은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부정으로 인해 국가의 계급과 국가의 덕이 제구실을 못하게 되어 결국 국가의 이익과 방위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생겨 국가 전체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그의 영혼의 덕들이 불의로 인해 제구실을 못하게 되어 이성이 욕구에 의해 잠식됨에 따라 그는 결국 영혼과 신체에 해로움을 입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소크라테스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정치체제를 조명하면서 이를 정의의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고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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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정리] 플라톤Plato / 『국가The Republic』 / 삼성출판사 -제3부-



  1. 플라톤, 조우현 역, 『국가』, 삼성출판사, (1990), pp.152 [본문으로]
  2. 플라톤, 조우현 역, 『국가』, 삼성출판사, (1990), pp.171 부분수정발췌 [본문으로]
  3. 플라톤, 조우현 역, 『국가』, 삼성출판사, (1990), pp.18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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